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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신앙, 교회

내가 듣고 싶은 설교론.

코로나 19사태로 인해 최근 몇개월간 가장 많은 온라인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항상 들어왔던 설교임에도 온라인으로 듣게 되면서 교인으로써 설교를 어떻게 들을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면서 동시에 신자로써 설교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신학을 전공하지도 읺았고 알지도 못하며 단지 인생의 대부분을 교회에서 보낸 경력뿐이 없으므로 이 글은 신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글입니다.

신자(본인)에게 설교는 성경의 해석이고 그 해석이 지금 나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수 있는가에 대한 지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수단으로써의 설교는 다수의 교인과 설교자와의 대중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설교는 구어체인가 문어체인가 하는것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계속 하던 중에 최근 어느 프로그램에서 설교는 말이어야 한다는 말을 지나가면서 들었는데 그 점이 제가 하던 생각과 일치되는 것이어서 확신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글을 써보게 되었습니다.

많은 설교들을 들으면 크게 두가지 부류로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하나는 일상의 어휘를 쓰는 것이고 하나는 문어체의 어휘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설교 원고의 의존도였습니다. 설교 원고를 정말 코피를 쏟아가며 정열을 다해 준비하는것을 충분히 느낄만한 내용임을 들으면서 어느 설교라도 느끼게 됩니다. 20~40분 동안 끊임없이 읽어내는 엄청난 물량을 한자한자 써내려간 그 노력이 담긴 원고는 정말 그 과정자체가 대단하다고 모든 설교들을 들으면서 느끼고 목회자분들을 존경하게 됩니다만... 그렇게 열정을 다한 원고이기에 한자라도 놓치게 되면 잘못될거 같은 긴장감에 설교자도 회중도 그 내용 자체로 들어가지 못하고 원고에 매여 있음을 문뜩문뜩 느끼게 됩니다.

원고에 매여 있는 설교.. 이것이 내가 그렇게 설교의 본질로 들어가지 못하는거 아니었는가 하는..

때문에 드는 생각은 설교는 문어체로 쓰어진 구어체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원로 목사님이신 장상래 목사님의 설교가 대표적이라고 봅니다.

분명히 원고를 충분히 작성해 오심에도 실제로 풀어지는 설교는 구어체이고 그 내용들은 성경에서 벗어나지 않고 분명한 대주제와 소주제를 벗어나지 않고 계속 "말"로 풀어가십니다. 때문에 글로 쓸때 나도 모르게 하게 되는 인과관계에 대한 분명한 논증의 제시, 그를 보강할 예화들이 필요하게 되고, 최종 결론로 그럴듯하게 문장으로 만들어져야 해서 뭔가 논리적으로 분명한 문장을 써낼려 하는 그런 경향을 보이게 되는것 같구요.

이러한 '말'로 풀어주시는 설교가 가능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설교의 주제가 정리가 되고 이게 판서설교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능력이 되는것 같습니다.

반면, 참 멋진 문장들과 주제들을 나열함에도 실제로 설교를 듣는 입장에서 필기를 하려다보면 대주제/소주제로 정해진 문장 외에는 쓸 내용이 거의 없게 되는 설교들을 자주 보게 되는데(물론 저 개인적인 정리 능력 부족도 이유겠지만) 이련 경우가 전형적인 문어체로 논리적으로 씌여지는 설교의 특징인것 같습니다.

또다른 좋은 예가 아침라디오인데 개인적으로 놓치지 않고 들을려 하는 TBS 뉴스공장과 CBS김현정의 뉴스쇼의 진행자들입니다.

김어준의 오프닝멘트는 분명히 원고로 씌어진 글인데 실제 멘트를 들으면 전형적인 구어체이고 짧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김현정PD의 인터뷰를 듣고 있자면 분명히 사전 질문지대로의 질문이 대부분인데 그 질문들을 충분히 구어체로 전환하여 진행하고 때문에 청자들은 인터뷰이들이 자기와 얘기하는 것같은 느낌을 받게 되고 이 점의 뉴스쇼를 지금의 위치에 올려놓은 거 같구요.

설교를 구어체로 한다는 건, 설교자가 그 설교의 내용을 충분히 숙지할 뿐더라 그 숙지한 내용이 한번의 설교를 위해서가 아니고 본인이 쌓아 온 신학사조에 기반한 출력물이어야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각종 논리와 문서 작성의 기술에 따른 연설문에 불과한 것이고 그것은 개신교에서 정의하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근거한 가르침이 될수 없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원고에 얽매이지 않는 극단에 이르면 돌아가신 모 목사님처럼 설교단에 올라가기 직전에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주제가 바뀌는것도 가능할거구요.

문어체로 씌여지는 구어체는 그래서 단순히 그 어휘의 사용뿐 아니라 그 주제의 선명함이 근거가 되어야 하고 단순히 시간을 채우기 위해 원고의 분량을 맞추는게 아니라 선정한 주제를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 씌여지는 원고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