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믿음, 신앙, 교회

십일조에 대한 박윤선박사의 연구 논문

최근 들어 집안에서 십일조에 대한 실제적인 부딛힘이 있었다. 물론 다들 잘 이해하고 합의가 되어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하는데 이 때문에 지금 세대에서의 십일조는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다시한번 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좋은 글을 보게 되어 옮겨 놓고자 한다.


박윤선 목사님이 1950년대에 노회에 제출하고자 작성한 이 작은 논문을 읽고 있자니 정말 치열하게 연구하고 고민하였을 당시의 신학풍이 작게 나마 느껴지고 오히려 작금의 교회 신학이 후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까지도 느끼게 되었다.


------------------------------------------------------------------

제목: 십일조 헌금과 그 사용방법에 대하여

이 작은 논문은 지난 번 부산 노회시에 노회원들 중에서 질문한 문제를 해답하기 위한 것이다. 노회의 부탁으로 이 연구를 발표한다. 그 질문 내용은 이렇다. 곧

문 의 서

주후 1956년 9월 4일

문의자 씨 명(약)

 

부산 노회장 귀하

하기와 같이 문의하오니 성경적으로 지시하여 주심을 경요하나이다.

교역자 및 교인의 십일조 헌금으로 본 교회에만 전부 헌금하는 것이 가한지 혹은 하기 사항에 사용하는 것도 가한지 지시하여 주심을 요망하나이다.

1. 교회 월정 헌금

2. 교회 주일 헌금

3. 성전 건축 헌금

4. 개인 구제 헌금

5. 개인 특별 감사 헌금

 

이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답함이 좋은 줄 안다.

 

1. 십일조 헌납은 구약 시대에 신정국가의 하나의 제도화한 것이었느니 법령으로 실시하던 것이었다. 그것을 드리는 자가 기쁜 마음으로 실행해야 향기로운 것이겠지만 아니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처음 난 자를 바치는 것도 아니하면 벌을 받도록 된 것이다(출13:13).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신약의 시대의 연보는 신정국가의 법령으로 실행시키는 것이 아닌 만큼, 자원하여 내는 것이다(고후8:1-15, 특히 11절 참조)

 

2. 십일조를 사용하는 목적은 주로 (1) 레위 족속과 제사장들의 생활비를 제공하기 위함(민18:24,26,28). (2) 가난한 자들과 고아와 과부와 같은 외로운 자들을 구제하려 함이다(신14:22-27). 그러므로 신약 시대도 신자가 연보의 일부를 가지고 빈자나 외로운 자들을 구제할 수 있다(롬15:25-26).

 

3. 이제 다시 생각할 문제들이 있다. (1) 신약의 시대에 연보하는 자가 그 소산의 십분지 일이란 수량을 유일한 표준으로 할 것인가? 십분지 일이란 수량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바친 수량이었고(창14:20) 이스라엘 백성이 레위 족속에게 그렇게 바쳤으니만큼 역사적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이상적 수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 교회는 신정국가의 법령으로 다스리는 국가가 아니고 의문과 기타 외부적 의식의 제재에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초월하게 된 영적 단체이니 만큼 십분지 일이란 수자의 법령적 제재는 받지 않는다. 그러나 십분지 일이라는 수량이 이상적인 수량이니 만큼 그것을 신약 시대 신자들도 자원하여 표준으로 삼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교리화하거나 제도화할 것은 아니다. 신약 시대의 신자들은 원하여 소득의 십분지 일 이상도 하나님께 바침이 좋을 것이다(고후8:1-15). 교회는 신약 교회는 교인들이 연보하는 일에 십일조 혹은 십일조 이상을 강요하거나 표준을 세워 지령할 것은 아니다. 장로교 예배 모범 제 18장 4조에 말하기를 "목사마다 자기 교회가 감심으로 헌금하는 습성을 배양하는 것이 마땅하니 신도마다 다소를 물론하고 자기 힘 있는 대로 바치게 할찌니라"고 하였다.

 

(2) 신약 시대의 신자가 자기가 드릴 연보 수량(십일조 혹은 기타 수량)의 사용 목적을 자의 대로 생각하고 또한 자기 목적에 따라 활당하는 것도 자유로 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장로교 예배모범 18장 3조가 대답한다. 거기 말하기를 " 그 수납금은 당회의 감독하에서 교회 각 대리국과 기타 자선 사업과 그리스도의 사업을 위하여 분배할 것이니 분배 다소와 일체 계획은 시시로 의결하되 혹 헌금하는 자가 특별한 소원히 있을 때에는 그의 원을 따라 삼가 실행할찌니라"고 하였다. 요컨대, 신약 시대의 연보는 법령에 의한 것이 아니고 신자가 자의대로 또는 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고후8:11). 구약 시대에는 예배를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리게 되어 있었으니만큼(요4:19-21) 외부적 제도에 치중하였다. 그러니만큼 그 때 이스라엘 백성은 헌금에 외부적 제재를 방았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신자들은 개인으로나 단체로나 또는 어디서나 신령과 진리에 의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할 수 있다는데(요4;22-24) 치중한다. 신약 종교는 보다 더 영적인 것인 만큼 신자의 개인적 자유를 존중시하며(고후3;17) 자기 혼자도 하나의 성전인 사실을 성경에서 알고 있다(고전 3;16-17,6:19-20,롬12:1-2).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을 섬기는 의미에서 어떤 개인들(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도 일종의 연보 행위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교회를 통하여서만 실시되는 것이 아니다. 백부장 고넬료가 교회를 통하지 않고 친수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한 것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셨다(행10:1-4). 잠19:17절에 말하기를 ,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하였다. 잠17:5참조. 마10:42에 말하기를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바리새 교인이 하나님께 재산을 바쳤다는 미명으로 부모를 공양하지 않는 사실에 대하여 예수님을 책망하셨다(마15:4-6). 약1:27엔 말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서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서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였다. 마25;31-46참조.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께 바칠 물질을 가난한 자 구제의 목적(기카 하나님께 바치는 의미 있는 목적)을 위하여 교회의 지령없이 사용할 수 있다.

 

(3) 우리는 교회에 드리는 헌금을 등한히 하면 안된다. 교회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항존 단체로서 복음을 전하며 보수하는데 가장 믿을만한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 전도와 복음 파수를 위하여서도 교회는 이렇게 귀한 기관이다. 그러니맘큼 이 기관엔 물질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신자가 다른 좋은 일보다 교회에 물질을 바쳐야 된다(눅8:1-3,빌4:18). 구약 시대에도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성전 봉사와 제사장의 생활비로 제공한 것이다. 그만큼 그때의 신자가 하나님께 직속한 거룩한 일을 위하여 물질적으로 힘껏 봉사하였다. 이 일은 고금을 물론하고 원측에 있어선 변하지 않는다. 출23;15에 말하기를 "공수로 내게 보이지말찌니라"고 하였다. 신16:16참조. 신약 시대에도 신자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 연보 드려야 할 것을 가르친다. 다만 그 수량에 있어서 일정한 숫자 표준은 세우지 않았다.(Cassels Concise Bible Dictionary P.728. under new economy liberality enjoined on christians. No specific proportionof the earnings is mentioned......). 십일조 헌납에 자세하였던 바리새인들에게 대하여 예수님은 그들이 종교 윤리적 동기는 없이 외식으로 그러한 점을 꾸짖으셨다. (마23;23, 눅11:42). 그러나 그들이 십일조 헌납하는 그것은 좋게 여기셨다. 이 점을 보면 예수님의 교훈이 십일조라는 숫자를 표준으로 세우신 듯하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해석하고 읽어야 한다.

 

해석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으니 (1) 그가 이 말씀을 하신 때는 아직 그의 구속 사업이 완성되지 않은 것만큼(죽었다가 다시 살으시기 전이므로) 구약적인 제도를 아직 그대로 옳게 보신 시절이었다. 마8:4참조. 이점에 있어서 놀발 켈덴회이스(Norval Geldenhuysl)의 누가복음 (11:42) 주석 제 342페지를 참조하라.

 

 

(2) 그리고 둘째 해석은, 그 귀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고한 말씀(눅11;42)은 십일조의 바리새식 실행 그대로를 용인하시는 말씀이라기보다 그것에 대한 원측적 실행(숫자를 기계적으로 따지지 않고 하나님께 정성껏 바침을 의미함) 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예수님의 행적과 교훈을 밝혀 해설한 사도들의 서신들을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연보를 어떤 일정한 수량으로 제도화하지는 않았다. 예수님의 교훈이, 십일조와 같은 구약의 예식적 규례도 아주 폐지하시지는 않고 그것에 대한 신약적 실행(즉 원측적 실행)을 필요시한 것은 사실이다(H.N. Ridderbos, De Komst Van Het Koninkrijk .p.264-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