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 수요 예배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으로 진행 되는 중.

아무래도 교리이다 보니 궁금한 점들이 생기는데 이를 chatGPT를 이용해서 답변을 얻어봤다.

진짜 이정도면 정말 최고의 목사님을 개인교사로 둔 느낌.

실제 설교에서 인용된 성경구절들이 대부분 답변에 포함되었다는게 더 놀랍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9문 해설

2024년 7월 31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9문을 관련 성경구절들을 포함하고 장로교 주요 주석을 참조해서 자세히 설명해줘
ChatGPT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은 1563년에 작성된 개혁주의 신앙 고백서로, 교리 교육의 중요한 자료입니다. 59문은 신앙의 중요성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다룹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9문

질문: 이 모든 것을믿는 것이 당신에게 어떻게 유익합니까?

답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습니다.

관련 성경 구절

  1.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2. 요한복음 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3.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4. 에베소서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장로교 주요 주석

1. 믿음의 유익

장로교 신학에서는 믿음이 신자에게 주는 유익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믿음은 단순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전인격적인 신뢰와 헌신을 의미합니다. 신자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자신에게 전가됩니다. 이로 인해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습니다.

2. 의롭다 함

의롭다 함(justification)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신자를 죄 없는 자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행위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속죄를 통한 것입니다. 신자는 믿음을 통해 이 의를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화평을 누립니다.

3. 영생

영생은 단순히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신자는 현재의 삶에서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누리고, 이 관계는 영원히 지속됩니다.

4. 믿음과 행위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지만, 참된 믿음은 선한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믿음은 신자의 전인격을 변화시키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이끕니다. 따라서 믿음과 행위는 분리될 수 없으며, 행위는 믿음의 열매로 간주됩니다.

결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9문은 믿음의 본질과 그 유익을 명확하게 설명하며, 신자가 오직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개혁주의 신앙의 핵심 교리 중 하나로, 성경에 근거한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59에서 61문을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해줘

 

ChatGPT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9문에서 61문은 신앙의 중요성과 칭의의 본질을 다룹니다. 각각의 문답과 관련 성경 구절, 그리고 장로교 주요 주석의 내용을 함께 설명하겠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9문

질문: 이 모든 것을 믿는 것이 당신에게 어떻게 유익합니까?

답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습니다.

관련 성경 구절

  1. 로마서 1:17 - 복음의 의가 믿음을 통해 드러나며,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2. 요한복음 3:36 - 믿음으로 영생을 얻고,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머문다고 합니다.
  3. 로마서 5:1 -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고 합니다.
  4. 에베소서 2:8-9 - 은혜로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았고, 이는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장로교 주요 주석

59문에서는 믿음을 통해 신자가 얻게 되는 유익, 즉 의롭다 함과 영생에 대해 설명합니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신자의 의로움을 보장하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강조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0문

질문: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우십니까?

답변: 나의 양심이 나의 심각한 죄와 여전히 내게 남아 있는 죄로 인해 나를 고소하나, 나는 아무 공로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온전한 속죄, 의와 성결을 내가 마치 한 번도 죄를 범한 일이 없는 것처럼, 마치 모든 순종을 다 이룬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내 것으로 삼아 그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관련 성경 구절

  1. 로마서 3:21-28 - 하나님께서 주신 의는 율법 외에 나타났으며,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설명합니다.
  2. 빌립보서 3:8-9 -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렸으며,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인한 의를 얻는다고 말합니다.
  3. 고린도후서 5:21 - 죄를 알지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장로교 주요 주석

60문에서는 칭의의 본질을 다룹니다. 신자는 자신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순종이 신자에게 전가됨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1문

질문: 왜 당신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십니까?

답변: 나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만족, 의와 성결이 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것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것들을 나의 것으로 삼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오직 믿음입니다.

관련 성경 구절

  1. 로마서 3:22 -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를 설명합니다.
  2. 로마서 4:5 - 일하지 않더라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를 설명합니다.
  3. 로마서 10:4 -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가 율법의 끝이 된다고 설명합니다.
  4. 갈라디아서 2:16 -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합니다.

장로교 주요 주석

61문에서는 믿음과 칭의의 관계를 명확히 설명합니다. 칭의는 신자의 행위나 공로에 기초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기초한 것입니다. 믿음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공로를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신자가 의롭게 되는 유일한 방법임을 강조합니다.


이 세 가지 문답은 신자가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받아들이고 의롭다 함을 얻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이는 개혁주의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교리로, 신자의 구원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60문을 율법과 관련되어 설명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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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0문은 율법과의 관계를 통해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방식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요소는 율법의 역할과 그리스도의 역할, 그리고 믿음을 통한 칭의입니다.

60문: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우십니까?

질문: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우십니까?

답변: 나의 양심이 나의 심각한 죄와 여전히 내게 남아 있는 죄로 인해 나를 고소하나, 나는 아무 공로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온전한 속죄, 의와 성결을 내가 마치 한 번도 죄를 범한 일이 없는 것처럼, 마치 모든 순종을 다 이룬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내 것으로 삼아 그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율법과 관련된 해석

1. 율법의 기능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을 나타내며,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율법은 또한 죄를 드러내고, 인간이 그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함으로써 죄인이 됨을 증명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3:20에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하며, 율법의 역할이 우리의 죄성을 드러내는 것임을 설명합니다. 율법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며, 인간은 그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2. 율법의 요구와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완전한 의를 요구하시며, 죄에 대한 형벌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신하여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셨고, 그 순종은 신자에게 전가되어 신자가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게 합니다.

3. 칭의와 믿음

칭의는 신자가 자신의 죄로 인해 율법 앞에서 정죄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신자의 행위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로마서 3:28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선언합니다.

4. 율법과 은혜의 조화

신자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는 율법이 무의미하거나 폐지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은 신자의 삶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지침이 되며,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는 신자가 율법을 사랑하고 지킬 수 있도록 합니다.

결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0문은 율법과 그리스도의 관계, 그리고 신자가 오직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함을 받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이는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는 역할을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셨기에 신자가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의 행위나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됩니다.

'낯선 의', alien righteousness 에 대해 설명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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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의'(Alien Righteousness) 또는 '타의적 의'(Imputed Righteousness)는 주로 루터교와 개혁주의 신학에서 중요한 교리로 다루어지는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인간이 본래 자신의 의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겨질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념 설명

  1. 의의 외재성 (Externality of Righteousness)
    '낯선 의'라는 용어는 이 의가 우리에게 내재적이지 않으며, 외부로부터 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즉,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이나 공로로는 의를 얻을 수 없으며, 그 의는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이 의는 인간의 자연적 상태와는 무관하며, 우리가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그리스도는 완전한 순종을 통해 율법을 완전히 이루셨고, 그의 의는 신자들에게 전가됩니다. 이 전가(imputation)는 법적 선언으로, 하나님께서 신자를 죄 없는 자로 선언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지며, 신자의 의는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외부의 것이라는 뜻에서 '낯선 의'입니다.
  3. 루터의 교리
    마르틴 루터는 이 개념을 "simul justus et peccator" (동시에 의인과 죄인)라는 표현으로 설명했습니다. 즉, 신자는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여겨지지만, 여전히 죄성을 지닌 존재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자가 자신의 의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의존하여 의롭게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4. 개혁주의 관점
    개혁주의 신학에서도 이 개념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존 칼빈은 칭의가 인간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된 결과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신자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으며, 인간의 공로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성경적 근거

  •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 빌립보서 3:9: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에 대해 말합니다.

결론

'낯선 의'는 신자가 자신의 공로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중요한 신학적 개념입니다. 이는 인간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고 있으며, 우리의 의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개념은 신자의 구원과 칭의의 이해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복음의 핵심적인 교리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누가 정의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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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의' 또는 '타의적 의'(Alien Righteousness)라는 개념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의되고 강조되었습니다. 루터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선구자였으며, 이 개념은 그가 구원의 교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루터는 '낯선 의'를 통해 신자는 자신의 공로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를 "simul justus et peccator"(동시에 의인과 죄인)라는 표현으로 설명하며, 신자가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음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과정을 강조했습니다.

루터의 이러한 가르침은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 교회의 구원론에 대한 중요한 대항 개념이었으며, 이는 후에 개혁주의 신학, 특히 칼빈주의와 같은 다양한 개신교 전통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따라서 '낯선 의' 개념은 루터의 신학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그의 칭의론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성경구절 3개를 제시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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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의' 개념과 관련된 성경 구절들은 인간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강조하는 구절들입니다. 다음은 이 개념과 관련된 주요 성경 구절 세 가지입니다:

  1.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되는 과정을 설명하며,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2. 빌립보서 3:9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에 대해 말하며,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3. 로마서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 이 구절은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하며, 인간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에 의한 구원을 나타냅니다.

이들 구절은 '낯선 의'의 신학적 기초를 제공하며, 인간이 자신의 공로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를 뒷받침합니다.

60문 답의 원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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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1563년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작성되었으며, 원래는 독일어로 작성되었습니다. 60문의 원문을 독일어로 제시하겠습니다:

Frage 60: Wie bist du vor Gott gerecht?
Antwort: Nur durch den wahren Glauben an Jesus Christus. Das ist, obschon mein Gewissen mich anklagt, dass ich gegen alle Gebote Gottes schwer gesündigt und keines gehalten und noch immer zu allem Bösen geneigt bin, doch Gott, ohne all mein Verdienst, aus lauter Gnade, mir die vollkommenen Genugtuung, Gerechtigkeit und Heiligkeit Christi schenkt und zurechnet, als hätte ich nie Sünde gehabt noch getan, und als hätte ich selbst all den Gehorsam vollbracht, den Christus für mich geleistet hat, sofern ich solche Wohltat mit gläubigem Herzen annehme.

이 독일어 원문을 통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0문은 신자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가 어떻게 신자에게 전가되어 칭의가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영문으로도 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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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0문의 영어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Question 60: How are you righteous before God?
Answer: Only by true faith in Jesus Christ. Even though my conscience accuses me of having grievously sinned against all God’s commandments, of never having kept any of them, and of still being inclined toward all evil, nevertheless, without any merit of my own, out of sheer grace, God grants and credits to me the perfect satisfaction, righteousness, and holiness of Christ, as if I had never sinned nor been a sinner, and as if I had been as perfectly obedient as Christ was obedient for me. All I need to do is accept this gift of God with a believing heart.

이 영어 번역은 신자가 자신의 공로나 행위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낯선 의' 개념은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의롭다 여겨지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신칭의에 대한 개신교의 두가지 관점을 상세히 설명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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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내에서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Alone) 교리에 대한 두 가지 주요 관점은 루터교적 관점개혁주의(칼뱅주의) 관점입니다. 이 두 전통은 모두 이신칭의의 핵심 개념에 동의하지만, 일부 신학적 세부사항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1. 루터교적 관점

핵심 개념

  • 의의 전가: 루터교는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imputed)된다고 주장합니다. 이 전가는 법적 선언으로, 신자의 행위와 무관하게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적용됩니다.
  • 외적 의: 루터교는 '낯선 의'(alien righteousness)를 강조하며, 신자가 의롭게 여겨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외적 의가 신자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신자의 내적 변화와는 별개로, 하나님 앞에서의 법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 동시에 의인과 죄인 (Simul Justus et Peccator): 루터는 신자가 동시에 의인이고 죄인이라는 개념을 강조했습니다. 신자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만, 여전히 죄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신자가 의로움과 죄악성을 동시에 지닌 상태를 나타냅니다.

성례의 역할

  • 루터교는 성례전이 구원의 수단으로 작용한다고 믿습니다.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특히 세례와 성만찬이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이 성례를 통해 신자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실제로 경험하고, 믿음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

  • 루터교는 믿음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는 개인의 감정이나 경험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에 기초합니다.

2. 개혁주의(칼뱅주의) 관점

핵심 개념

  • 이중 전가: 개혁주의는 칭의에서 두 가지 측면을 강조합니다: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 이는 신자가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 언약 신학: 개혁주의는 언약 신학을 강조하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 관계를 통해 구원이 주어진다고 봅니다. 이 언약은 구약의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신약의 새 언약을 포함합니다. 언약의 중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신자는 이 언약에 의해 칭의와 구원을 받습니다.
  • 칭의와 성화의 구분과 연결: 개혁주의는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만, 둘을 긴밀히 연결된 것으로 봅니다. 칭의는 하나님 앞에서의 법적 선언으로, 신자는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성화, 즉 신자의 실제 삶에서의 거룩한 변화로 이어집니다.

선택과 예정

  • 개혁주의는 구원의 교리에 있어서 선택과 예정의 교리를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주권적인 선택에 따라 구원받을 자들을 예정하셨으며, 이는 인간의 공로나 행동과 무관하게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결정된다고 봅니다.

성례의 역할

  • 개혁주의는 성례를 중요한 신앙의 요소로 간주하지만, 루터교와 달리 성례 그 자체가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대신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고, 신자의 믿음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여깁니다.

결론

루터교와 개혁주의는 이신칭의를 신앙의 핵심으로 삼으면서도, 그 교리의 세부 사항과 신학적 강조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루터교는 '동시에 의인과 죄인'이라는 개념을 통해 신자의 현재 상태를 강조하며, 성례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받는 것을 중시합니다. 반면 개혁주의는 언약 신학과 예정론을 통해 신자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 이루어짐을 강조하며, 칭의와 성화의 연속성을 중시합니다. 이 두 관점은 모두 개신교 신학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며, 각각의 전통에 따라 구체적인 교리적 적용과 신앙 실천이 이루어집니다.

현대 대표적인 개신교단들의 아에 대한 입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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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개신교의 대표적인 교단들은 이신칭의 교리에 대해 다양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몇몇 주요 교단들의 입장을 간략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1. 루터교회 (Lutheran Church)

루터교회는 이신칭의를 신앙의 중심 교리로 삼고 있으며,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에 따라 이를 강조합니다. 루터교회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를 강력히 지지하며, 이 신앙 고백은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및 《루터 소교리문답》과 같은 루터교 문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성례전인 세례와 성만찬은 중요한 신앙의 요소로, 믿음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실제로 경험하는 방법으로 간주됩니다.

2. 장로교회 (Presbyterian Church)

장로교회는 존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며, 개혁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신칭의는 장로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로, 이중 전가(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 개념을 강조합니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며, 특히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장로교회는 또한 언약 신학을 중요하게 여기며, 구원의 교리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예정론과 연결시킵니다.

3. 침례교회 (Baptist Church)

침례교회는 이신칭의를 지지하지만, 일반적으로 더 개인적이고 체험적인 신앙을 강조합니다. 침례교회는 개인의 믿음 고백과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중요시하며, 구원의 은혜가 믿음을 통해서만 주어진다고 믿습니다. 침례교회는 성례(침례와 성찬)를 중요한 신앙의 상징으로 여기지만, 은혜의 전달 수단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대신, 성례는 신앙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행위로 간주됩니다.

4. 감리교회 (Methodist Church)

감리교회는 존 웨슬리의 영향을 받아, 이신칭의를 강조하면서도 성화(sanctification) 과정에 무게를 둡니다. 감리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한 칭의를 중요하게 여기며, 칭의 이후 성화 과정을 통해 신자가 계속해서 거룩해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감리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며,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지만, 인간이 그 은혜를 받아들이고 거부할 수 있는 선택을 가진다고 봅니다.

5. 오순절교회 (Pentecostal Church)

오순절교회는 이신칭의를 인정하면서도, 성령의 강력한 체험과 성화, 그리고 성령의 은사를 강조합니다. 오순절주의는 신앙 생활에서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며, 구원받은 후에도 성령의 능력을 통해 계속해서 성화될 것을 중요시합니다. 오순절교회는 믿음을 통한 구원 외에도 성령 세례와 같은 체험적 요소를 신앙 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깁니다.

결론

이신칭의는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에서 중요한 교리로 인정받고 있지만, 교단마다 그 강조점과 신학적 세부 사항이 다릅니다. 루터교와 장로교는 이신칭의를 법적 선언으로 이해하며, 루터교는 성례의 역할을, 장로교는 언약과 예정론을 중시합니다. 반면, 감리교는 성화를 강조하고, 침례교와 오순절교회는 개인의 신앙 체험과 성령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신칭의는 여전히 개신교 신앙의 핵심 교리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신칭의에 있어서 개인의 신앙의 역할은 어떻게 되는지 장로교의 관점에서 설명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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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에서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Alone)에 있어서 개인의 신앙의 역할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1. 믿음의 수단으로서의 역할

장로교는 이신칭의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신자의 개인적 믿음이 칭의의 수단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의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이는 개인의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믿음 자체가 의를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됩니다.

2. 칭의의 법적 선언

장로교 신학에서는 칭의가 법적 선언(legal declaration)으로 이해됩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의롭다 선언하시며, 이 선언은 신자의 믿음에 근거하여 이루어집니다. 개인의 믿음은 이 선언을 수용하는 수단이지만, 칭의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의에 의존합니다. 따라서 믿음이 칭의의 조건이지만, 그 자체로는 구원의 공로가 아닙니다.

3. 믿음과 성화의 관계

장로교는 이신칭의와 성화(sanctification) 사이의 관계를 구분하지만, 둘을 연결된 과정으로 봅니다. 이신칭의는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여겨지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성화는 칭의 이후의 과정으로, 신자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신앙생활에서 점점 더 거룩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인의 믿음은 칭의와 성화 모두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성화 과정에서 신자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지속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4. 믿음의 기초와 내적 확신

장로교 신학에서 개인의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받으며, 이 믿음은 개인의 내적 확신을 형성합니다. 신자는 자신의 죄와 부족함을 인식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믿음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갖습니다. 이 믿음은 신자의 영적 삶을 지탱하고, 구원의 약속에 대한 지속적인 신뢰를 유지하는 데 중요합니다.

5. 믿음의 표현으로서의 회개와 순종

장로교에서는 개인의 믿음이 회개와 순종의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믿음은 단순히 정신적 동의에 그치지 않고, 신자의 삶 속에서 회개와 순종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이는 신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삶으로 나타내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회개와 순종은 칭의의 조건이 아니라, 칭의 이후의 신자의 삶에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결론

장로교에서 개인의 신앙은 이신칭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믿음을 통해 신자가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여겨지게 됩니다. 이 신앙은 법적 선언의 수단으로 작용하며, 칭의와 성화 모두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개인의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자의 내적 확신을 형성하고, 구원의 약속에 대한 지속적인 신뢰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관넘이서 성도의 삶에 대한 올바른 자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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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신학에서 이신칭의에 대한 이해는 성도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신자가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교리는 성도의 삶에 다음과 같은 올바른 자세를 요구합니다:

1. 감사와 경배

신자는 이신칭의의 은혜를 경험함으로써 깊은 감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 감사는 단순히 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삶 전체를 통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신자에게 전가하신 것에 대한 감사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으로 표현됩니다.

2. 믿음의 지속적인 실천

장로교에서는 믿음이 단순한 지식이나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살아 있는 신뢰로 이해됩니다. 성도는 자신의 믿음을 지속적으로 실천하며, 일상생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는 기도, 말씀 묵상, 예배 참여 등을 포함합니다.

3. 회개와 성화의 과정

이신칭의가 신자의 법적 선언임에도 불구하고, 회개와 성화는 신자의 삶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성도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화의 과정을 걸어야 합니다. 성화는 칭의의 결과로 나타나는 삶의 변화로, 신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점진적으로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4. 성도의 사명과 사회적 책임

장로교는 성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대표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사회적 책임, 정의를 실현하고,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나타내며, 공동체와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5. 사랑과 겸손

성도의 삶에서 사랑과 겸손은 중요한 미덕입니다. 장로교는 신자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며, 자신을 낮추는 자세를 강조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며, 신자는 자신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겸손을 반영해야 합니다.

6.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이신칭의의 교리는 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삶을 조정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표현으로 간주됩니다.

결론

장로교에서 이신칭의는 신자의 법적 지위에 관한 교리이지만, 성도의 삶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성도는 감사를 표현하고, 믿음을 지속적으로 실천하며, 회개와 성화의 과정을 거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 사랑과 겸손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신자가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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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사순절의 시작 : 2월 17일 (재의 수요일)

사순절의 끝: 4월 3일 토요일 (고난주간 마지막날)

그러면 전체 기간은 46일.  2.17 ~4.3

그중 주일은 제외 6일

따라서 46 6 = 40일 -> 사순.

기독교인이라면 사순절은 가장 큰 절기이고 단순히 종려주일, 부활주일의 일회성 주일이 아니라 6주간의 절기.

대강절과 사순절은 온 교회가 절기로 지켰으면 좋겠다. 설교도 찬양도..

태어나면서부터 교회를 다니면서도, 성경 일독을 하면서도 그 수많은 설교를 들으면서도 무슨 주제인지 어떤 내용인지 감을 못잡은 성경이 아가서 였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NIV 일독을 하면서 절의 구분이 개역개정과는 좀 다르게 되어 있어서 찾아보니 일종의 연극대본처럼 읽는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평신도이기에 이 구분이 신학적으로 정확한지 확신할 순 없지만 적어도 그 흐름은 알게 되어 이렇게 기록해봅니다.

그러면서 검색해보니 나름의 구분의 나누어 놓은 블로그도 있어서 링크 남깁니다.

https://m.blog.naver.com/ixiao/221476775587

추가로 아가서 자체에 대한 여러 해석들을 정리한 위키 링크도 같이 남깁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A%B0%80

이러한 형태로 읽다보니 장,절로 구분하여 읽기보다는 한번에 읽어나가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보여서 본문을 한번에 모아서 구분하였습니다.


1

1.    솔로몬의 아가라

신부

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 보다 나음이로구나

3.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4.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친구들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 포도주보다 더 진함이라

신부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5.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6.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7.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네가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친구들

8.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신랑

9.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10.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11.  우리가 너를 위하여  사슬에 은을 박아 만들리라

신부

12.  왕이 침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뿜어냈구나

13.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주머니요

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신랑

15.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신부

16.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신랑

17.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서까래로구나

2

신부

1.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신랑

2.    여자들 중에 내 사랑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신부

3.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

4.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5.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6.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

7.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8.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9.    내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11.  겨울도 지나고 도 그쳤고

12.  지면에는 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에 들리는구나

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 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신랑

14.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이 피었음이라

신부

16.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17.  내 사랑하는 자야 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을지라

 

3

신부

1.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

2.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 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

3.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4.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 집으로,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5.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6.    몰약과 유향과 상인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내 풍기며 연기 기둥처럼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가

7.    볼지어다 솔로몬의 가마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 명이 둘러쌌는데

8.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9.    솔로몬 왕이 레바논 나무로 자기의 가마를 만들었는데

10.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이요 자리는 자색 깔개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딸들의 사랑이 엮어져 있구나

11.  시온의 딸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의 어머니가 씌운 왕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

4

신랑

1.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구나

2.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오는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같구나

3.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4.    네 목은 무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방패 천 개,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5.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어린 사슴 같구나

6.    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7.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

8.    내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오너라

9.    내 누이,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10.  내 누이, 내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 포도주보다 진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향기롭구나

11.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12.  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13.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풀과

14.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15.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신부

16.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

5

신랑

1.    내 누이, 내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 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우유를 마셨으니

친구들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많이 마시라

신부

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4.    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5.    일어나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떨어지는구나

6.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는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

7.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겉옷을 벗겨 가졌도다

8.    예루살렘 딸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친구들

9.    여자들 가운데에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신부

10.  내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많은 사람 가운데에 뛰어나구나

11.  머리는 순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 같이 검구나

12.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우유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13.  뺨은 향기로운 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는구나

14.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하구나

15.  다리는 순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생김새는 레바논 같으며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16.  입은 심히 달콤하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딸들아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로다

6

친구들

1.    여자들 가운데에서 어여쁜 자야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아갔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신부

2.    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3.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

신랑

4.     사랑아 너는 디르사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 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

5.    네 눈이 나를 놀라게 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6.    네 이는 목욕하고 나오는 암양 떼 같으니 쌍태를 가졌으며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구나

7.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8.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9.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비와 후궁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친구들

10.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같이 아름답고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

신랑

11.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12.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를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에 이르게 하였구나

친구들

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

신랑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7

신랑

1.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숙련공의 손이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

2.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단 같구나

3.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4.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에 있는 연못 같고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

5.    머리는 갈멜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6.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즐겁게 하는구나

7.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

8.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9.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신부

 포도주는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내려서 자는 자의 입을 움직이게 하느니라

10.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11.  내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12.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술이 퍼졌는지, 석류 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에서 내가 내 사랑을 네게 주리라

13.  합환채가 향기를 뿜어내고 우리의 문 앞에는 여러 가지 귀한 열매가 새 것, 묵은 것으로 마련되었구나 내가 내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 둔 것이로다

 

8

신부

1.    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더라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2.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머니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게 하겠고

3.    너는 왼팔로는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손으로는 나를 안았으리라

4.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

친구들

5.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

신부

너로 말미암아 네 어머니가 고생한 곳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6.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7.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친구들

8.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을 받는 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

9.    그가 성벽이라면 우리는 은 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이라면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신부

10.  나는 성벽이요 내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가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

11.  솔로몬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 두고 그들로 각기 그 열매로 말미암아 은 천을 바치게 하였구나

12.  솔로몬 너는 천을 얻겠고 열매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으려니와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신랑

13.  너 동산에 거주하는 자야 친구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내가 듣게 하려무나

신부

14.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

 

 



설교에 대한 두번째 생각.

 

우리에게 의사소통을 하는데에는 시각과 청각의 감각을 각각 쓰게 됩니다.

 

글을 쓰고 읽는 것은 리얼타임으로 작성이 되는 것이 아니기에 본인이 써가는 글을 퇴고하게 되고 속도가 느리기때문에 자꾸 되뇌이게 되어서 논리를 구성해서 수정해 갈수가 있습니다. 글을 읽는 이도 마찬가지로 책이라는 매체가 계속 남아 있기 때문에 다시 되돌아 볼 수 있고 읽어 가는 속도를 조절하면서 사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구요.

 

말하고 듣는 것은 이와는 다르게 시공간에서 지나가버리는 것이기때문에 그 정보를 반추할 여유가 없이 그냥 흘러가게 되어 아무래도 사유의 시간을 가지기 보다는 즉흥적인 느낌이나 얻은 정보가 순간적으로 전체를 반영하게 되는것 같습니다.

 

그런데 설교는 말하고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원고를 기반으로 읽어 듣는 것에 가깝고 읽을 원고를 쓰는 과정이 그대로 청자에게 반영이 되는 매체의 변환이 일어나게 됩니다.

 

문제는 글을 쓸때는 충분한 사유와 앞뒤 문맥을 살피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칠 수 있는 장점이 있는데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논리적인 구성이 듣는 자의 머리에서는 동일한 논리로 전달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원고를 쓸때만큼 충분한 사유의 시간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정말 좋다라고 느낀 설교가 설교집으로 읽으면 유치하거나 논리의 부재를 느끼게 될 때가 있고, 반대로 무슨 말을 하는 지  전혀 모르겠고 졸리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설교가 주보의 요약본이나 설교집으로 읽으면 정말 좋다라고 느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설교의 원고가 작성될때는 이러한 청자의 상황을 반영하여 작성이 되어야 할것이고, 때문에 너무나 많은 소제목의 나열이나 설명을 위한 예화보다는 주제의 선명한 두각과 계속적인 반복이 필요하고 그를 위한 너무 복잡한 논리 구조를 도입하는건 위험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듣는 것만으로 혹은 일부 필기를 하기도 하지만 말하는 내용을 말하는 속도에 따라가면서 바로 이해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에 다른 툴을 쓰는 것이 효과적일때가 많고 그래서 판서 설교를 즐겨 하시던 원로목사님의 설교가 참 일관적이고 이해가 되는 쉬운 설교 였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판서를 하는 동안 생각의 여지를 청자에게 주기도 하고 판서 되어 있는 주제가 계속 글로 남아 있기 때문에 화자와 청자 모두 그 틀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아주 큰 장점이 있는거죠.

 

설교자 분들은 설교를 듣는 분들이 혹시 필기를 하시면 그 필기를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내가 논리적으로 짜였던 부분이 그대로 옮겨지는지, 그 주제가 전달이 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가장 좋은 방법인것 같고 단순히 가족들로부터 듣는 피드백보다 훨씬 좋은 피드백이 될거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코로나 19사태로 인해 최근 몇개월간 가장 많은 온라인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항상 들어왔던 설교임에도 온라인으로 듣게 되면서 교인으로써 설교를 어떻게 들을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면서 동시에 신자로써 설교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신학을 전공하지도 읺았고 알지도 못하며 단지 인생의 대부분을 교회에서 보낸 경력뿐이 없으므로 이 글은 신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글입니다.

신자(본인)에게 설교는 성경의 해석이고 그 해석이 지금 나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수 있는가에 대한 지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수단으로써의 설교는 다수의 교인과 설교자와의 대중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설교는 구어체인가 문어체인가 하는것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계속 하던 중에 최근 어느 프로그램에서 설교는 말이어야 한다는 말을 지나가면서 들었는데 그 점이 제가 하던 생각과 일치되는 것이어서 확신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글을 써보게 되었습니다.

많은 설교들을 들으면 크게 두가지 부류로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하나는 일상의 어휘를 쓰는 것이고 하나는 문어체의 어휘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설교 원고의 의존도였습니다. 설교 원고를 정말 코피를 쏟아가며 정열을 다해 준비하는것을 충분히 느낄만한 내용임을 들으면서 어느 설교라도 느끼게 됩니다. 20~40분 동안 끊임없이 읽어내는 엄청난 물량을 한자한자 써내려간 그 노력이 담긴 원고는 정말 그 과정자체가 대단하다고 모든 설교들을 들으면서 느끼고 목회자분들을 존경하게 됩니다만... 그렇게 열정을 다한 원고이기에 한자라도 놓치게 되면 잘못될거 같은 긴장감에 설교자도 회중도 그 내용 자체로 들어가지 못하고 원고에 매여 있음을 문뜩문뜩 느끼게 됩니다.

원고에 매여 있는 설교.. 이것이 내가 그렇게 설교의 본질로 들어가지 못하는거 아니었는가 하는..

때문에 드는 생각은 설교는 문어체로 쓰어진 구어체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원로 목사님이신 장상래 목사님의 설교가 대표적이라고 봅니다.

분명히 원고를 충분히 작성해 오심에도 실제로 풀어지는 설교는 구어체이고 그 내용들은 성경에서 벗어나지 않고 분명한 대주제와 소주제를 벗어나지 않고 계속 "말"로 풀어가십니다. 때문에 글로 쓸때 나도 모르게 하게 되는 인과관계에 대한 분명한 논증의 제시, 그를 보강할 예화들이 필요하게 되고, 최종 결론로 그럴듯하게 문장으로 만들어져야 해서 뭔가 논리적으로 분명한 문장을 써낼려 하는 그런 경향을 보이게 되는것 같구요.

이러한 '말'로 풀어주시는 설교가 가능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설교의 주제가 정리가 되고 이게 판서설교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능력이 되는것 같습니다.

반면, 참 멋진 문장들과 주제들을 나열함에도 실제로 설교를 듣는 입장에서 필기를 하려다보면 대주제/소주제로 정해진 문장 외에는 쓸 내용이 거의 없게 되는 설교들을 자주 보게 되는데(물론 저 개인적인 정리 능력 부족도 이유겠지만) 이련 경우가 전형적인 문어체로 논리적으로 씌여지는 설교의 특징인것 같습니다.

또다른 좋은 예가 아침라디오인데 개인적으로 놓치지 않고 들을려 하는 TBS 뉴스공장과 CBS김현정의 뉴스쇼의 진행자들입니다.

김어준의 오프닝멘트는 분명히 원고로 씌어진 글인데 실제 멘트를 들으면 전형적인 구어체이고 짧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김현정PD의 인터뷰를 듣고 있자면 분명히 사전 질문지대로의 질문이 대부분인데 그 질문들을 충분히 구어체로 전환하여 진행하고 때문에 청자들은 인터뷰이들이 자기와 얘기하는 것같은 느낌을 받게 되고 이 점의 뉴스쇼를 지금의 위치에 올려놓은 거 같구요.

설교를 구어체로 한다는 건, 설교자가 그 설교의 내용을 충분히 숙지할 뿐더라 그 숙지한 내용이 한번의 설교를 위해서가 아니고 본인이 쌓아 온 신학사조에 기반한 출력물이어야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각종 논리와 문서 작성의 기술에 따른 연설문에 불과한 것이고 그것은 개신교에서 정의하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근거한 가르침이 될수 없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원고에 얽매이지 않는 극단에 이르면 돌아가신 모 목사님처럼 설교단에 올라가기 직전에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주제가 바뀌는것도 가능할거구요.

문어체로 씌여지는 구어체는 그래서 단순히 그 어휘의 사용뿐 아니라 그 주제의 선명함이 근거가 되어야 하고 단순히 시간을 채우기 위해 원고의 분량을 맞추는게 아니라 선정한 주제를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 씌여지는 원고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홍xx 목사님, 또 홍xx 목사님, 최xx 목사님, 정xx 목사님 등..

큰 교회로 확장시키거나, 좋은 말씀으로 소문나고 사회복지 활동이나 헌신으로 평생을 목회해오시고 존경 받으시던 목사님들이 은퇴 이후에 이상한 자들과 어울리거나 이상한 발언들을 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게 됩니다.

왜 그럴까? 하는 고민을 해본 나름의 결론.

그분들이 본인의 일상 생활에 성경을 진짜로 적용하였는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내에서 목회자로 사역자로 설교자로 살아가는 삶은 평범한 교인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삶이 아니었던거라는 방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은퇴이후, 유튜브, 카톡, 혹은 비슷한 연배의 분들과 어울리면서 얻게 되는 일상의 삶을 성경의 프레임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게 아니라 그냥 그 정보를 현상자체로 받아 들이게 되고 따라서 그 조류에 휩쓸리고 계신게 아닌가 하는 ..

전x훈(x광x) 목사 같은 자를 본인들이 주관하는 집회의 주강사로 초대하는 행태나, 현 정권때문에 못살게 되었다는 발언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오는것을 보면서 그분들의 목회 활동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것은, 그 분들이 해 온 목회가 성도의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었겠다는 생각때문입니다.

7,80년대 고도성장의 시기에 같이 부흥하던 개신교가 더이상 성장하지 못하게 된 이유 역시 이런 삶과는 동떨어진 얘기들을 선배 목사들의 전철을 밟아 답습하는 현 수많은 교회의 시스템과 설교들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수천년을 이어온 성경의 힘은 그 안에 진리가 있기때문일텐데 이에 대한 목숨을 건 공부 없이 단순히 설교를 교훈 정도로 혹은, 지침 정도로 임의로 해석해서 듣기 좋게, 혹은 좋은 목소리와 웅변 스킬로 생각하는 수많은 설교들을 들으며 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에 바르게 적용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고, 내가 바르다라고 생각했던 삶의 태도와 결정들이 진짜 성경대로 인가 하는 고민을 또 하게 됩니다.

페북에 썼던 글....

 

이 글 쓰려면 나도 욕먹을 각오로 써야할려나?

얼마전 욕먹을 각오로 쓰는 한국 교회의 오적이라는 글이 여기저기 뜨거웠었나 봅니다. 저는 페친들이 관련?된 분들이 많다보니 나도 초기에 가서 보게 되었고 그 덧글들과 반론들을 초기에 접하게 되었는데 그게 확장되어 교계에서는 큰 이슈로 발전하게 된듯 하고 글쓴 목사님은 사과까지 하신 모양인데.....

싫은 소리 늘어놓은 이들은 밴드(찬양단)를 하거나 드러머거나 음향엔지니어이거나 싶습니다. 본인들이 교회에서 정말 노력하고 수고해서 드리는 찬양 형태에서 가장 큰 요소 중에 하나인 드럼을 거부하는 글에 대한 반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음악, 소리와 관련된 교회(교계)내에서의 모든 분야에 다 조금씩 발을 걸치고 있고 사역을 하다보니 그게 평신도일뿐이지만 여러 시각에서 나오는 의견들을 듣고 또 느끼게 됩니다.

한국사회가 통상 그렇지만 우리는 본인의 바운더리외의 다른 영역과 소통을 하는데 참 익숙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를 위해서는 삶의 여유도 있어야 하고 다양한 활동들을 통해 접하고 이해하는게 필요한데 사실 우리 사회에서는, 그리고 우리 교회, 교계에서는 그런게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게 현실이기때문입니다.

성가대 위주의 대형카페들에 가보면 찬양단, 특히나 밴드 음악이나 드럼사운드에 대해 엄청난 거부감을 표시하는 분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음향이나 찬양단 위주의 카페를 가보면 성가대, 합,중창, 오르간 등에 대한 불만을 표하는 분들을 종종 보게 되구요.

이러한 이유들에 대해 일일이 나열하는 것은 감당을 못할 것 같고...

저는 드럼 논란에서 나오는 반론들을 읽으면서 모두들 이상적인 상황만을 상정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교회에서 그러한 이상적인 상황과는 아주 거리가 먼 환경에서 드럼이 연주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거죠.

드럼연주자들의 절대 물러서지 않는 드럼톤?이라는 것 때문에 어쿠스틱을 고집하거나, 백석짜리 공간이나 500석짜리 공간이나 심지어 몇천석 공간이나 동일한 드럼 생톤을 내고 나머지 악기들, 모니터링들을 맞추는 상황들에 대한 이해를 하지 않고 본인의 톤만을 만족하게 연주하기 위해서 내는 음압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한 회중이나 다른 악기 및 싱어들의 고충은 무시하는 것들은 언급이 거의 안되는 상황..- 역시나 경험 많은 모집사님의 언급이 있기는 했었지만..

교회음악이라는 장르에서 가능한 모든 악기를 쓰고, 새노래로 찬양하자는 큰 전제는 예수님 오실 날까지 가져갈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이러한 전제는 우리가 할수 있는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찬양을 드리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의 수단으로써 존재한다는 걸 교회 안에서 음악을 하는 많은 이들이 잊는 건 아닐까 합니다.

이는 굳이 드럼이 아니라도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피아노가 성가대 반주를 하는데 불과 20명 남짓한 대원들의 소리를 압도해 버리면서도 본인은 클래식 전공이라 터치를 살려야 해서 작게 치면 안된다는 반주자..

성가대원과 피아노까지도먹어버리는엄청난볼륨으로 연주하면서 원래 파이프 오르간처럼 이정도는 나와줘야 한다며 볼륨 올리는 오르간 연주자...

성가대원들 중에서도 본인은 전공자이고 크게 내는게 도움을 주는거라며 질러대는 대원들..

찬양단 모니터링 안된다고 크게만 크게만을 외치는 싱어들과 악기주자들..

저음이 이정도는 나와줘야지 하면서 나오지도 않는 저음을 올려대는 엔지니어들도..

사실 음악이야 말로 예배의 두축이라고 할만큼 큰 역할을 함에도 그 투자에 비해 나오는 결과물이 크지 않기에 개인의 역량에만 의존하면서 벌어지는 수준의 저하가 이런 논란을 가져온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솔직히 지금의 열악한 상황들.. 작은 교회들에서는 회중에서 노래만 불러줘도 감사할만큼 봉사할 사람들이 없고.. 교회 음악을 클래식이든 실용음악이든 전공을 해도 변변히 사역을 하거나 수입을 얻을 자리 찾는것도 거의 불가능하고, 교회에서는 믿고 맡길 사역자를 찾고 싶어도 예산도 없고 사람도 없고..이러한 상황에서 서로 다른 분야에서 사역하는 이들이 다투고 싸울일만 생기는 작금의 상황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다양한 상황에서 여러가지 모습으로 음악을 가지고 사역이라고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 전에 하나님께 귀하게 드리기 원하는 모든 성도들이 아름답게 삶을 살아가는 그런 환경이 오길 기도합니다.

 

2017. 5. 27일 토요일.

운전을 하다가도 아름다운 교회를 보면 이름을 기억해놓을려고 하고, 해외 출장 중에도 멋진 교회들은 꼭 들러보고 사진을 남겨보는 나에게 '생명의 빛, 예수마을' 교회 방문에 대해서는 버킷 리스트 중의 1순위였습니다. 몇년전, 전 직장 동료의 작업 사이트 소개에서 처음 보았고 이제껏 보지 못한 건축물이라서 맘에 다져놓았었고, 이후로도 관심을 가진 교회였었지만 거기까지 가는건 정말 오래걸렸네요.

자주 다니는 합창관련 카페에서 우연히 본 합창단의 정기공연 포스터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사진이 바로 이 교회의 본당 사진이었습니다. 그 합창단은 '코리안싱어즈' 홍정표 교수님이 지휘하는 합창단. 이 교수님은 세미나에서도 가끔 뵈었고 항상 지휘하시는 공연을 보고 싶었기에 그야말로 완벽한 조합이 아니랄수 없겠네요..

교회 성가대 밴드에도 안내문을 붙이고, 식구들에게도 토욜 약속 빼라고 해놓고..

그러나 막상 당일날 간건 우리 막내랑 아내랑 셋이서만 ..

집이 강동인고로 일단 설악IC까지는 막히지만 않으면 금방.. 거기서부터 국도랑 산길을 15km쯤 달려서 도착.

 

도착해서 내려다 본 예수마을http://jesusville.org/web/main/main

아래쪽부터 안내판에서는 다일 공동체 표지판이 계속 되는데 사실상 같은 장소에 위치해 있다. 갑자기 어떤 관계인지 궁금..

여튼 입구에 보이는 다일 공동체 푯말들을 넘어서 조금 더 올라가면 가장 높은 곳에 유리창으로 마감된 건물이 보입니다.

겉으로 봐서는 유명한 사진들에서 보는 그런 이미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일단 입구에 들어서면 사진과 같은 소개판이 있고 거기에는 홍목사님도 항상 말씀하시던 두 분의 기도와 헌신으로 세워진 교회의 내력에 대한 이야기가 새겨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면 로비를 채운 예술품들이 보여서 느낌은 교회가 아니라 미술관을 방문한 느낌? 그 로비를 지나 좁은 문을 지나면 드뎌 그렇게 이미 익숙해져버린 본당이 나타납니다.

본당의 천정과 벽면을 가득채운 러시아 홍송. 네 곳에 위치한 파이프 오르간. 그 뒤에 수줍게 자리잡은 스피커. 스피커를 제외하면 정말 인공적인 게 느껴지지 않은 왠지 자연에 있는 듯한 느낌.

360도 원형 회중석이기 때문에 본당에 들어서면 사실 어디가 강대상인지조차 불분명하고 실제 강대상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마 실제 예배가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만 이 회당은 하나님의 자녀로써 모두 같은 위치에 있음을 자리에 앉는 것 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습니.

그래도 음향밥 먹었던 입장에서 이 공간 자체의 건축음향 특성은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일단 큰 소리는 생각보다 1차 반사음이 크지 않아서 잔향을 보는것만큼 많이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천정의 나무들과 기둥으로 세운 나무들이 모두 디퓨져의 역할을 하고 있는거 아닌가 싶네요. 대신 작은 소리들은 바스락거리는 소리까지도 맞은편 좌석까지도 잘들렸고, 원형 구조상 초점 현상이 이지 않나 싶은데 측정했던 기록을 살펴보고 싶은 .. 물어볼 사람 있을텐데~~

여튼 이러한 음향적인 특성이 공연의 성격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것으로 생각되었는데 이는 합창을 통해서도 어느정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내가 들은 자리가 맞은편이 아니라 합창단 자리 바로 옆이었다는건데때문에 반사음(잔향)없이 직접음을 바로 들어서 너무 힘들었다는데 있었는데.. 중간에 맞은편으로 가서 서서라도 들어봤어야 하지 않나 하는 후회가..

Korean singers는 서울장신대 홍정표 교수님의 지도 아래 전공자분들 위주로 구성된 합창단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선곡은 한번 들어보고 싶었던 Korean Mass (홍정표 곡)를 비롯한 자장가 모음, 친숙한 가곡들이라서 비전공자에게는 Korean Mass만 버텨주시면 즐길만한 곡들이에요, 참아주세요.. 라는 느낌?

여튼 Korean Mass에 대한 소개와 함께 공연 시작. 이후로는 다른 인터미션이나 곡 소개 없이 끝까지 한번에 진행 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 곡의 절반 이상을 아카펠라로 채워서 상당히 인상 깊었고, 반주와 같이 연주되는 곡들도 잘 어울렸는데 특히나 피아노와의 어울림이 인상 깊었고, 플룻 등과의 개별 악기들과도 음량이나 음색이 잘 어울렸습니다. 아쉬운건 솔로악기나 솔리스트들이 합창단의 중간에 있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게, 앞서 느낀 음향의 영향으로 각 악기의 방향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면이 있어서 분리되어 들리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베리톤이라서 베이스 파트 관심 많았는데 4명의 소수임에도 음색이나 성량이 대단해서 충분히 커버를 하시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만 음량의 발란스 때문에 너무 크게 내는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잔향이 충분한 공간이면 반사음으로 많은 이가 선 느낌을 주는데 제가 앉은곳에서 들은 잔향으로는 베이스가 직접음으로 들려서 어색함이..

소프라노 파트는 특정 고역에서 플랫이 심하게 되는걸 느꼈습니다. 어느곡인지 기억이 안나는데 아예 반음쯤 떨어진 곳도 있었고.. 다만 아카펠라 곡들이 많았음에도 무너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이끌어 가신부분이 있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앨토는 인원에 비해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고 한두분의 성량으로 커버되는 느낌이어서 아쉬웠습니다. 앨토나 베이스의 경우는 아무래도 아무리 좋은 음색이라도 소수의 성량보다는 다수의 대원을 묶어서 내는 음색이 나올 때 안정적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부분에서 아쉬웠네요.

테너의 경우는 항상 그렇듯이 좋은 음색과 피치를 가지고 불러주셔서 좋았습니다. 다만 아쉬웠던건 첫소리를 내는데에서 계속 밀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마도 좋은 발성을 위해서 공명을 준비하는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는데 이게 습관이 되어버린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었네요.

전체적으로 아쉬웠던건 이 합창단이 분명히 이보다 훨씬 좋은 소리로 좋은 연주를 할 수 있는 팀이라는 느낌은 드는데 연주회 내내 산만하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피치나 박자 모두가.. 특히나 Korean mass 같은 곡은 1번 레퍼토리로 여기고 연습을 하실텐데 그만큼의 감동을 느끼지는 못해서.. 결국은 성가곡에서 였던가? 도입부를 놓치는 사고도 나고..

제 결론은 연습이 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아니면 대원분들의 변경이 있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뭐 틀리거나 말거나..

중간에 특송으로 불러주신 시각장애우 분들의 특송은 정말 좋았습니다. 피아노는 마이크 없이 하면서 듀엣만 마이크를 쓰는데 다행히도 그 볼륨이 적당했고, 워낙 많이 불러보신듯 살짝 불안해서 사고날만하겠다 싶은 후에 오히려 바로 자리를 잡아가서 복구하는게 인상싶었습니다. 처음엔 긴장해서 음정이나 박자가 조금 불안했지만 중반부 이후로는 좋아졌고, 후반부에서는 솔로부, 듀엣부 모두 심금을 울리는 노래를 불러주셨네요.

마지막으로 고향의 봄 앵콜은 제가 감사했습니다. 이런 좋은 공간에서 맘껏 노래 불러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게 쉽지 않은데 기회를 주셔서~~~

홍목사님의 마지막 설명, 후원 요청은 좀 짧았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급작스런 찬송가로 코드를 높게 잡아서 아주 우렁찬 폐회송이 되었네요. 아마 반주자님 많이 당황스러우셨을듯.

제가 아주 짧은 소견으로 아쉬운 점을 위주로 썼지만 사실, 전체적으로 정말 행복했습니다. 좋은 합창단의 무반주 창작곡들을 정말 좋은 공간에서 맘껏 듣는 것 자체가 정말 오랜만에 누리는 행복이었고 가족들과 함께 해서 더 좋았네요.



몇년전부터 정말 관심있었고 강원도쪽 갈 때마다 국수교회 표시판을 보면서 꼭 들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교회인데 이번에 드뎌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지난주 금, 토욜을 교회에서 하는 아카펠라 중창팀과 함께 산음휴향림에서 MT 비슷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야 뭐 악기나 음향이 필요한 것도 아니어서 아무데나 발길 가면 그곳이 연습실이긴 하는 팀이라~~ㅎㅎ

유부남 세가정과 처녀 두 자매로 단촐하게 갔는데, 가면서 부터 이런 교회가 있는데 시간 되면 한번 오면서 들러보자라고 얘기했더니

그냥 마지못해 별게 있나요? 하는 정도로 반응이 있었는데 아침 식사 이후 스케쥴이 남아서 그럼 교회 들르자 해서 가게 되었습니다.

 

외부에서 그냥 아담한 교회여서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그냥 평범해 보이는데요? 그러더군요.

 

입구에서 토욜이라 청소하시는 연세드신 사찰집사님(?)이 계시고, 누구한테 여쭤볼까 하다 여자분이 일하셔서 여쭤봤더니만 진철하게도 본당까지 안내해주시더군요. 나중에 청년부 전도사님이라고 하시길래 신현형제 이름을 좀 팔았습니다.ㅎㅎㅎ

 

본당을 들어서니 워낙 사진으로 자주보던 곳임에도 실제 접하니 감동이 밀려오더군요.

그때부터 우리 멤버들이랑 식구들도 입이 딱 벌어지더군요.

그 작은 공간에 넓은 무대와 강대상, 시골교회임에도 놓여져 있는 챔버의 의자수.. 등등..

 

그리고 우리팀이랑 너무나 잘 어울리는 공간~~

 

당장 딱 필이 꽂혀서 우리 가지고 있는 레퍼토리들을 불러 보았습니다.

관객은 우리 식구들 세사람이었지만 얼마나 좋았는지...

한 30분 부르면서 말 그대로 행복해지더군요.

 

밑천 떨어지고 나갈려고 하는데 밖에서 들으셨는지 사찰집사님께서 보여주실곳이 있다고 저희를 안내해서 1층 작은 공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곳은 작은 모임들을 가질 수 있는 룸들과 공간이 있었는데 주위 벽엔 그간 있었던 문화행사들이 걸려있었습니다.

 

나중에 이어서~~~

 

그 공간은 둥그런 형태의 공간인데 벽을 빙 둘러서 최근 행사들의 안내 걸게들이 걸렸있었습니다.

같은 사이즈로 걸게를 프린트해서 쓰시던데 최근의 행사만 걸려있고 시간이 지나면 친교실로 옮겨 놓으신다고 하더군요.

지금 생각해도 대략 20개 이상 걸려 있었던것 같네요.

 

그곳을 둘러보고는 친교실이라는 작은 카페 같은 곳이 있는데 그곳으로 안내해 주셨습니다.

거기는 주방까지도 개방이 되어 있는 곳이어서 우리 자매들이 직접 있는거 찾아서 꺼내 차를 마셨습니다. 헐~~

테이블이 대략 4~5개 정도 되었던것 같은데 웬만한 허접 카페들은 저리 가라고 할정도로 너무나 안목이 높은 인테리어 더군요.

그곳에서 우리끼리 마치 우리 교회인듯 차를 마시는데 어느분이 들어 오셨습니다.

딱봐도 포쓰~~가 목사님이신것 같아서 인사드리고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이야기를 알고 갔지만, 웬 뜬금없이 교회냐는 분위기였던 우리 멤버들은 목사님의 말씀 한마디한마디에 감탄을 연발했습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였죠.

목사님께서도 목회사역의 방향, 교회의 현황, 운영 방법, 그 결과들, 그리고 동역과 비젼  등등등 짧은 시간에 너무나 많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처음 뵙고 너무나 당황스러운 상황임에도 이렇게 담소를 나누는게 가능한게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 엔지니어들 모이면 통성명없이도 수다를 떠는 바로 그 모습이었나 싶어요. 하나님 안에서의 공통의 관심사 말이죠~~

 

우리 아줌마들은 교회의 인테리어에 깜짝 놀라더군요.

심지어는 교회 로비에 있는 가구들은 직접 만드시는지, 사오시는지, 누가 하시고, 업자를 통하시는지 직접 하시는지 등등등..

본당 강대상의 꽂꽂이는 백미라고나 할까나?

사진에서 잘 안보이는데 저게 유리우유병에다가 식물을 심어서 강대상에 걸어둔거랍니다.

참 많은 생각을 했죠. 일회성 아름다움을 위해 생명을 꺽어서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고 저렇게 지속가능한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리..

곳곳에 배치된 가구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각종 안내판과 걸게들..

이 교회에서는 이미 모든 분들이 인테리어 전문가라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이제 업자 소감을~~

본당의 컨셉은 일종의 회랑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한국의 마당놀이 판이라고 해도 될것 같고, 고대의 작은 아고라?

별로 커보이지 않는 공간이라는 느낌은 강대상과 회중석이 그만큼 밀접하다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구요.

그렇게 커보이지 않는 공간임에도 회중석은 350석 정도 된다고 하니 참 알차게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아담한 공간의 건축을 독일에 설계를 의뢰해서 받았다고 하시던데 처음부터 원하시는 사역의 방향을 분명히 하고 있었기에 이런 좋은 공간과 운영이 가능한 교회가 되었겠다 싶더군요.

일단 사진처럼 벽체가 모두 적벽돌과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서 잔향이 많구요, 방송실은 강대상 맞은편 위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그 곳이 가장 소리 좋은 곳이 아닐까 싶던데 올라가보지 않아서리~~

세심하게 신경을 쓴걸 느끼는게 본당의 문들이 모두 방음문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출입구도 세군데로 균등하게 되어 있었구요.

강대상에 신디 몇대가 보이는걸로 봐서는 찬양단도 잘 하실것 같은데 실제 운영은 대단히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어찌 생각하면 조금만 욕심(엔지니어로써의)을 버리면 정말 멋진 회중 찬양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기악기들도 웬만하면 어쿠스틱 사운드로 만들어서 공간에 뭍을 수 있으면 공간을 채우기 위해서 귀터져라 쏟아내야하는 압박 없이 회중과 함께 찬양하는 그런 예배가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문제는 드럼.ㅠ..ㅠ.ㅠ

드럼 빼고 봉고나 퍼구션 정도로 해야할껄요? 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런것도 아이디어 일듯 싶고요~

 

이런 외적인 것들보다 더 대단한건 역시 컨텐츠이고 소프트웨어이고 운영이겠죠?

저 나름대로는 이 지역이 특수한 점이 몇가지 있는데 먼저는 지리적으로 수도권이고 서울에 멀지 않다는 점이고, 두번째는 그럼에도 지역은 전형적인 농촌이라는 겁니다. 서울에서는 가깝지만 농업외에 특별히 지역경제의 기반이 없다는 건 젊은층이 있기 어렵다는 거겠죠. 이런 상황에서 문화 사역이 이렇게 최고의 완성도를 가지고 운영하신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가는 한방에 느껴지더군요.

실은 담임목사님이 하도 궁금해서 검색을 해보았더니 몇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88년도에 부임하셨고, 성악을 전공하셨고, 동생목사님과 동역하고 계시고 두분 형제목사님과 사모들이 전문사역을 하시면서 외부 강사분들을 모시면서 문화목회를 해오고 계시다는 정도이던데 관련된 기사들 대부분이 가보면 놀라는 문체가 드러나더군요.

88년 국수리라면 교통도 힘들고 정말 시골이었을텐데 그런 상황에서 젊은 목회자들이 지역을 변화시키는 영향력있는 교회를 세워가시는게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처음엔 공연 운영을 위해 예산도 필요하고 섭외라든가 여러가지 상황이 힘들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공연 스케쥴을 조절해주어야 할 정도로 공연팀들이 줄서 있는 형편이라고 하시더군요. 게다가 한번 공연을 해본 공연자들은 또 서고 싶어하셔서 이제는 섭외에 대해서는 어려움을 겪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실은 이건 본당에서 연습을 해보면서 느낀 점인데, 이런 공간에서 무대에 선다는 건 연주자로써는 상당히 부담스러울겁니다.

본인이 무대에 있기보다는 사방에 둘러싸인 바로 앞의 관객들로 인해 같이 있는다는 느낌을 받게 될것 같았거든요.

그러니 오히려 이런 무대가 너무나 낯설게 느껴지게되는 부담감이 있지만, 공연을 진행하면서 관객과의 일체감, 공간과의 일체감은 그냥 잔향이 많아서 좋다 수준을 넘어서는 최고의 감동이 연주자에게도 동일하게 줄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목사님께서도 연주자들이 공연이 끝나면 그걸 너무나 좋아한다고 하시더군요.

 

더 좋은 건 교인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있는것 같습니다.

공간의 특성상 클래식 공연에 아주 어울리는 관계로 그 쪽으로 많은 공연들이 열리게 되는데 이런 공연들에 교인들이 전부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신다고 하더군요. 금요일 등 평일 저녁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200분 이상의 관객이 공연장을 채우신다고 합니다.

이런 참여는 공연자들에게는 더 큰 매력이기도 할 것 같더군요.

목사님 말씀은 시작하기 전까지는 참 부담스러워 하시지만 공연을 끝내고 나면 항상 만족하고 가신다고 하더군요.

이에 대한 교회의 역할을 간단하게 정의해 주셨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의 역할은 공연에 참여해주는 것이고 어린 친구들의 역할은 공연을 보고 도전하고 싶어하는 것' 이라는겁니다.

게다가 사찰집사님의 말씀처럼 공연을 통해  적극적인 교회 홍보를 거의 하시지 않기때문에 누구라도 부담없이 참여할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이런 시스템이 당근 하루아침에 이루어질수는 없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가 지역사회에서 감당해야할 몫을 찾고, 그 방향으로 사역의 방향을 정하고, 또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열매를 맺기까지의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런 멋진곳을 볼수 있게 된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그보다 더 좋은건 목사님이나 사찰집사님과의 대화를 통해 느낀 짧지만 강한 그 멋진 말씀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께 강하게 추천드리니, 양평 근처 다니시다가 생각나시거든 꼭 한번 들러보세요.

 

http://www.cr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30

 

http://www.monul.com/monul/bbs/board.php?bo_table=gos_report&wr_id=13&page=3&PHPSESSID=3e1d311b09ff08b3e222f22df8c3ebfb

최근 들어 집안에서 십일조에 대한 실제적인 부딛힘이 있었다. 물론 다들 잘 이해하고 합의가 되어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하는데 이 때문에 지금 세대에서의 십일조는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다시한번 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좋은 글을 보게 되어 옮겨 놓고자 한다.


박윤선 목사님이 1950년대에 노회에 제출하고자 작성한 이 작은 논문을 읽고 있자니 정말 치열하게 연구하고 고민하였을 당시의 신학풍이 작게 나마 느껴지고 오히려 작금의 교회 신학이 후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까지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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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십일조 헌금과 그 사용방법에 대하여

이 작은 논문은 지난 번 부산 노회시에 노회원들 중에서 질문한 문제를 해답하기 위한 것이다. 노회의 부탁으로 이 연구를 발표한다. 그 질문 내용은 이렇다. 곧

문 의 서

주후 1956년 9월 4일

문의자 씨 명(약)

 

부산 노회장 귀하

하기와 같이 문의하오니 성경적으로 지시하여 주심을 경요하나이다.

교역자 및 교인의 십일조 헌금으로 본 교회에만 전부 헌금하는 것이 가한지 혹은 하기 사항에 사용하는 것도 가한지 지시하여 주심을 요망하나이다.

1. 교회 월정 헌금

2. 교회 주일 헌금

3. 성전 건축 헌금

4. 개인 구제 헌금

5. 개인 특별 감사 헌금

 

이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답함이 좋은 줄 안다.

 

1. 십일조 헌납은 구약 시대에 신정국가의 하나의 제도화한 것이었느니 법령으로 실시하던 것이었다. 그것을 드리는 자가 기쁜 마음으로 실행해야 향기로운 것이겠지만 아니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처음 난 자를 바치는 것도 아니하면 벌을 받도록 된 것이다(출13:13).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신약의 시대의 연보는 신정국가의 법령으로 실행시키는 것이 아닌 만큼, 자원하여 내는 것이다(고후8:1-15, 특히 11절 참조)

 

2. 십일조를 사용하는 목적은 주로 (1) 레위 족속과 제사장들의 생활비를 제공하기 위함(민18:24,26,28). (2) 가난한 자들과 고아와 과부와 같은 외로운 자들을 구제하려 함이다(신14:22-27). 그러므로 신약 시대도 신자가 연보의 일부를 가지고 빈자나 외로운 자들을 구제할 수 있다(롬15:25-26).

 

3. 이제 다시 생각할 문제들이 있다. (1) 신약의 시대에 연보하는 자가 그 소산의 십분지 일이란 수량을 유일한 표준으로 할 것인가? 십분지 일이란 수량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바친 수량이었고(창14:20) 이스라엘 백성이 레위 족속에게 그렇게 바쳤으니만큼 역사적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이상적 수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 교회는 신정국가의 법령으로 다스리는 국가가 아니고 의문과 기타 외부적 의식의 제재에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초월하게 된 영적 단체이니 만큼 십분지 일이란 수자의 법령적 제재는 받지 않는다. 그러나 십분지 일이라는 수량이 이상적인 수량이니 만큼 그것을 신약 시대 신자들도 자원하여 표준으로 삼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교리화하거나 제도화할 것은 아니다. 신약 시대의 신자들은 원하여 소득의 십분지 일 이상도 하나님께 바침이 좋을 것이다(고후8:1-15). 교회는 신약 교회는 교인들이 연보하는 일에 십일조 혹은 십일조 이상을 강요하거나 표준을 세워 지령할 것은 아니다. 장로교 예배 모범 제 18장 4조에 말하기를 "목사마다 자기 교회가 감심으로 헌금하는 습성을 배양하는 것이 마땅하니 신도마다 다소를 물론하고 자기 힘 있는 대로 바치게 할찌니라"고 하였다.

 

(2) 신약 시대의 신자가 자기가 드릴 연보 수량(십일조 혹은 기타 수량)의 사용 목적을 자의 대로 생각하고 또한 자기 목적에 따라 활당하는 것도 자유로 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장로교 예배모범 18장 3조가 대답한다. 거기 말하기를 " 그 수납금은 당회의 감독하에서 교회 각 대리국과 기타 자선 사업과 그리스도의 사업을 위하여 분배할 것이니 분배 다소와 일체 계획은 시시로 의결하되 혹 헌금하는 자가 특별한 소원히 있을 때에는 그의 원을 따라 삼가 실행할찌니라"고 하였다. 요컨대, 신약 시대의 연보는 법령에 의한 것이 아니고 신자가 자의대로 또는 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고후8:11). 구약 시대에는 예배를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리게 되어 있었으니만큼(요4:19-21) 외부적 제도에 치중하였다. 그러니만큼 그 때 이스라엘 백성은 헌금에 외부적 제재를 방았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신자들은 개인으로나 단체로나 또는 어디서나 신령과 진리에 의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할 수 있다는데(요4;22-24) 치중한다. 신약 종교는 보다 더 영적인 것인 만큼 신자의 개인적 자유를 존중시하며(고후3;17) 자기 혼자도 하나의 성전인 사실을 성경에서 알고 있다(고전 3;16-17,6:19-20,롬12:1-2).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을 섬기는 의미에서 어떤 개인들(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도 일종의 연보 행위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교회를 통하여서만 실시되는 것이 아니다. 백부장 고넬료가 교회를 통하지 않고 친수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한 것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셨다(행10:1-4). 잠19:17절에 말하기를 ,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하였다. 잠17:5참조. 마10:42에 말하기를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바리새 교인이 하나님께 재산을 바쳤다는 미명으로 부모를 공양하지 않는 사실에 대하여 예수님을 책망하셨다(마15:4-6). 약1:27엔 말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서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서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였다. 마25;31-46참조.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께 바칠 물질을 가난한 자 구제의 목적(기카 하나님께 바치는 의미 있는 목적)을 위하여 교회의 지령없이 사용할 수 있다.

 

(3) 우리는 교회에 드리는 헌금을 등한히 하면 안된다. 교회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항존 단체로서 복음을 전하며 보수하는데 가장 믿을만한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 전도와 복음 파수를 위하여서도 교회는 이렇게 귀한 기관이다. 그러니맘큼 이 기관엔 물질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신자가 다른 좋은 일보다 교회에 물질을 바쳐야 된다(눅8:1-3,빌4:18). 구약 시대에도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성전 봉사와 제사장의 생활비로 제공한 것이다. 그만큼 그때의 신자가 하나님께 직속한 거룩한 일을 위하여 물질적으로 힘껏 봉사하였다. 이 일은 고금을 물론하고 원측에 있어선 변하지 않는다. 출23;15에 말하기를 "공수로 내게 보이지말찌니라"고 하였다. 신16:16참조. 신약 시대에도 신자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 연보 드려야 할 것을 가르친다. 다만 그 수량에 있어서 일정한 숫자 표준은 세우지 않았다.(Cassels Concise Bible Dictionary P.728. under new economy liberality enjoined on christians. No specific proportionof the earnings is mentioned......). 십일조 헌납에 자세하였던 바리새인들에게 대하여 예수님은 그들이 종교 윤리적 동기는 없이 외식으로 그러한 점을 꾸짖으셨다. (마23;23, 눅11:42). 그러나 그들이 십일조 헌납하는 그것은 좋게 여기셨다. 이 점을 보면 예수님의 교훈이 십일조라는 숫자를 표준으로 세우신 듯하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해석하고 읽어야 한다.

 

해석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으니 (1) 그가 이 말씀을 하신 때는 아직 그의 구속 사업이 완성되지 않은 것만큼(죽었다가 다시 살으시기 전이므로) 구약적인 제도를 아직 그대로 옳게 보신 시절이었다. 마8:4참조. 이점에 있어서 놀발 켈덴회이스(Norval Geldenhuysl)의 누가복음 (11:42) 주석 제 342페지를 참조하라.

 

 

(2) 그리고 둘째 해석은, 그 귀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고한 말씀(눅11;42)은 십일조의 바리새식 실행 그대로를 용인하시는 말씀이라기보다 그것에 대한 원측적 실행(숫자를 기계적으로 따지지 않고 하나님께 정성껏 바침을 의미함) 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예수님의 행적과 교훈을 밝혀 해설한 사도들의 서신들을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연보를 어떤 일정한 수량으로 제도화하지는 않았다. 예수님의 교훈이, 십일조와 같은 구약의 예식적 규례도 아주 폐지하시지는 않고 그것에 대한 신약적 실행(즉 원측적 실행)을 필요시한 것은 사실이다(H.N. Ridderbos, De Komst Van Het Koninkrijk .p.264-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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