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로 역할을 감당한지 딱 육개월이 되었습니다.
얼치기 아마츄어가 사오십명에 이르는 성가대를 이끌어간다는게 말도 안되는 상황인데, 그럼에도 정말 좋으신 대원분들과 반주자님들 덕분에 어찌어찌 흘려보낸게 벌써 반년..

그 과정에서의 가장 큰 어려움은 선곡..이었습니다. 사실 처음도 마지막도 모두 선곡.
정해진 곡을 최선을 다해 해석하고 리허설을 하고 연주를 하는건 언제든 감당할 수 있지만 선곡은 정말 어려웠습니다.
일주일에 한곡 고르는게, 그것도 3,4분짜리 노래 하나 선곡하는것도 그럴진데.. 설교는 어떨까 하는 감히 공감을 해봅니다.

지난 5월 37년의 사역을 마치고 은퇴하신 장상래 원래 목사님의 글이 교단 신문에 실렸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목사님 참 훌륭하시다.. 는 생각과 동시에 난 참 행복하고 운?이 좋은 성도구나.. 라는 생각을 동시에 했습니다.

적어도 목회자라면 이렇게 생각하고 해주었으면 하는 요소들이 정확하게 쓰신글과 맞았기 때문이고, 지난 십수년간의 은평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을 통해 목사님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살아올 수 있었기때문입니다.

앞으로도 교회는 시끄러울거고, 여기저기서 개독 소리는 울려날거고, 여전히 이상한 교리들, 교회들, 교단들, 이단들이 일어날거고 교회내에서 상처받는 일들도 많겠지만 이런 담임목사님과 같이 간다면 더이상 아쉬울게 없을거다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가수가 노래를 잘 불러야하는것처럼,
연주자가 악기를 잘 연주해야하는 것처럼,
목회자는 설교에 100%이상을 쏟아 부어낼 수 있는 이어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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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repress.kr/6086/

지난 5월 10일 동서울노회 은평교회 담임목사직에서 은퇴하고 원로목사직에 취임한 장상래 목사의 목회자 세미나 초청 강의 중 일부를 발췌허락 받아 싣는다목회 일선의 동역자들에게 뜻깊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편집자 주

 

목사와 설교  

< 장상래 목사, 은평교회 원로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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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중심으로 사는 목사에게 설교는 목회의 꽃이요 생명  

교회를 잘 섬기는 길은 설교에 진력하고 설교한 대로 사는 것  

 

교회와 목회 중심의 목사

   목회자에게 최고의 가치관은 교회뿐이다교회가 참되게 부흥하고 교회가 교회다워진다면 더 큰 소망은 없을 것이다지난 은혜의 길목에서 나는 복잡한 인생의 문제들도 교회에 유익이 없으면 미련 없이 포기할 수 있었다교회 문제 외에 나머지에 대해서는 별 애착이 없었다그래서 마음이 편했다.

   처음 개척할 때는 매달 첫 주는 반드시 기도원에 올라갔다아버님의 소천 때도 장례 후에 바로 기도원에 가버렸다그걸 보고는 이웃 교회 목사님이 대단하다고 했는데목회자가 교회 중심으로 생활방식이 완전히 확정되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나는 정이 많은 편이나 목회 사역에서는 정에 매이지 않으려 애썼다형제 7남매가 다 모여도 때 되면 책 보따리를 싸서 기도원에 갔다나는 생각이 너무 단순하다중요한 것만 생각한다어디 볼만한 곳에 여행을 갔다 와도 모든 것을 금방 다 잊곤 했다여행 사진을 다시 봐도 금방 생소할 만큼 다 잊어버렸다교회와 목회 외에는 별로 재미있는 것이 없었다.

설교를 목회의 생명으로 삼는 목사

   그런데 교회가 참되게 부흥하고 교회가 교회다워지기를 바라는 이 목회의 큰 소망을 이루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설교이다나에게 일주일 단위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한 가지만 말하라면 당연히 설교이다 이것이 내가 추구한 목회의 가장 큰 주제였다목회의 꽃이 설교이다설교는 목회의 생명이다.

   하지만 내 스스로 설교를 잘한다고는 한 번도 생각 한 적이 없다그래서 열심히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나는 거의 고정적으로 금요일에 기도원에 가서 설교 준비를 완료하고 다음 주일 본문과 제목도 미리 정하여 토요일 저녁에 내려왔다해외에 나가도 어지간하면 금요일에는 들어왔다만일 토요일에 혼인 주례를 하면 하루 앞당겨 목요일에 기도원에 올라갔다.

   사실 바쁘게 심방을 하고 보니 도무지 설교 본문을 정하는 게 쉽지 않았다어떤 경우엔 아무리 뒤져 봐도 설교할 분문이 안 잡히고 설교 할 내용이 없었다너무도 고통을 겪었다그러다가 기도원에 올라가 기도하며 설교 본문을 접해 보니 어렵지 않게 설교를 준비하게 되었고 다음 주일 본문 제목도 미리 정할 수 있었다.

   목사의 영성은 설교를 준비할 때와 설교 할 때에 최고조에 이른다외모든 학벌이든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목사도 강단에서 잘 준비된 은혜로운 설교를 하면 모든 성도들이 아주 감동을 받고 목사를 좋게 본다하나님이 그렇게 쓰신다목사가 강단 밖에서는 볼품없어 보여도 설교하는 강단에서는 빛나 보인다목사가 설교를 할 때는 하나님께서 그를 최고의 상태에서 사용하신다.

   언젠가 내 설교 테이프를 듣고 은혜를 받은 사람이 시장에서 일하는데 나를 직접 만나고 싶다며 잠깐 들르라 해서 갔더니 목사님그 장 목사님 맞으세요키가 이렇게 작으세요?” 했다그래서 키는 작아도 내가 은평교회 그 장 목사 맞습니다라고 하며 피차 웃었다하나님은 부족한 사람도 그렇게 쓰신다.

   이처럼 목사의 영성이 최고조일 때는 설교를 준비 할 때이다그러므로 목회자는 스타일은 각기 달라도 설교 준비를 위한 자신만의 시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내 경험으로는자신만의 시공간에서 설교 준비를 할 때 다음 주 본문을 미리 정하면 한 주간 내내 그 본문과 주제에 관련하여 생각을 집중할 수 있고 그 설교의 내용도 풍성해진다목사에게는 심방과 전도와 교육이 다 필요하다그러나 심방하고 전도하고 교육하는 일로만 부산하게 뛰어 다니면 정작 설교가 안 보인다재삼 명심할 것은 무엇보다 설교가 우선이라는 점이다.

   나는 설교 준비를 철저히 했다. ‘그렇습니다저렇습니다까지 원고에 다 썼다너무나 자신이 없기에 그랬다사실 심방할 때도 마음으로는 설교에 대해 고민했다그만큼 부담을 가졌다늘 설교 자료를 고민했고 심지어 텔레비전을 보아도 설교 생각을 했다설교 사역으로 가장 잘 섬기는 것목사가 설교를 설교답게 하는 것이 목사의 최우선 사명이다

   목회자가 아무리 인품이 착해도 설교에 실패하면 결국 성도를 멸시하는 것이다전도를 잘하고 심방도 잘하고 사랑을 많이 베풀고 인간관계가 좋아도 설교를 못하면 제대로 목회하는 것이 아니다성도들이 일주일 내내 말씀을 사모하며 어렵사리 주일날 달려왔는데 깨달음을 주고 마음에 흡족한 은혜로운 설교를 못 들으면 얼마나 안 좋은 일인가영적으로 갈급한 성도들을 일주일간 방치 한 거나 다름없으니 그 얼마나 성도를 섬기지 못한 일인가.

설교한 대로 사는 목사

   설교와 관련하여 중요한 점을 덧붙이자면 바로 설교한 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개척 초기에 교단 세미나에 참석하였는데 강사가 홍정길 목사님이셨다그때 목사가 교회를 가장 크게 잘 섬기는 것이 뭐냐설교한 대로 살아 주는 것이 교회를 가장 잘 섬기는 것이다라는 그분의 말씀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전까지 교회를 잘 섬기는 것은 그저 죽자 사자 열심히 뛰는 것인 줄 알았는데 목사가 설교한 대로 살아 주는 것이 성도와 교회를 가장 잘 섬기는 것이라는 홍 목사님의 말씀은 정말 감동과 충격이었던 것이다그래서 그후로는 그때 배운 바대로 하려고 무척 노력했다목사가 설교도 잘 해야 하지만 그 설교대로 살아 주는 것이 성도를 가장 잘 섬기는 것이라고 지금도 믿는다.

   요즘엔 좋은 책과 자료도 많아서 부지런히 기도하며 노력하면 설교 준비는 어느 정도 잘 할 수 있지만목사가 설교한 대로 안 살면 성도들은 상처를 받고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게 된다. “설교를 하신 목사님도 저러는데 우리는 뭐 특별히 애쓸 거 있나…” 이렇게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가라앉아 버린다무엇보다 가정에서 인정을 못 받는다설교는 저렇게 해놓고 집에서 하는 언행은 설교대로 하지 않는다고 가족들이 속으로 무시하게 된다그러면 가정생활도 자녀교육도 원만할 수 없다.

   주의 종들은 하나님에 붙들리고 경건이 깊으면 목회를 해볼 만하다이것은 맞다저것은 아니다 하는 분별력과 판단력이 생긴다그래서 어떤 순간에도 갈등이 그리 많지 않다그런데 영적인 방황에 빠지는 이유는 균형이 안 잡혀서 그렇다몸의 균형이 안 잡혀 있으면 정상적인 활동이 힘들 듯이 영적인 활동도 그렇다그 영적인 균형을 잡아 주는 것이 바로 설교이다목사가 설교한 대로 살아서 영적인 균형이 잡히면 가정생활도 안정되고 성도들에게도 존경을 받는다.

참 좋은 목사

   목사가 교회와 목회 중심으로 살고 일주일 내내 설교로 씨름할 수 있다면 다른 조건은 어쨌든 일단 괜찮은 목사이다더욱이 설교한 말씀대로 살고자 부담을 느끼는 목사라면 참 좋은 목사이다이 점에서 나는 어떤 목사였는지 생각하면 부끄럽다그러나 참 좋은 목사가 되려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발버둥친 것만은 사실이다.


랜디 포시 (Randy Pausch)라는 영낙없이 웃는 모습이 짐캐리를 닯은 교수님이 있었다. 가장현실쪽에서 상당한 하이레벨이셨던 분. 그분이 한 '마지막 강의'라는 동영상이 있다. 사실 마지막 강의 라는 책이 몇년전에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기억은 했으나 관심이 없어서 들여다 보지도 않았으나 어느분이 페이스북에 포스팅해주신 7분짜리 요약본 동영상을 보고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전체 동영상을 찾아보았고, 책까지 찾아보게 되었다.

사실 책만 읽는다면 그런 감동이 느껴지지 않을것 같다. 사형선고에 가까운 의사의 진단을 받고 불과 몇달 안남은 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밝은 모습과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삶에 대한 통찰력은 강의 내용과 상관없이 한문장한문장이 그대로 전율처럼 머리를 꿰 뚫고 지나가버렸다.

우린 참 꿈을 너무 가볍게 여기거나 너무 무겁게 여기는 것 같다. 내 어릴적 꿈은 무엇이었던가, 아니 이번달 내가 이루고자 했던 꿈이 있었던가, 내가 이루어가는 것은 무엇인가? 열심히 해야지, 어떤일을 꼭 해내야지 하면서 사실 그저 다짐만 하고 맘만 먹을뿐 실제로 한가지를 완성하는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지.....

버킷리스트라고 거창히 외래어를 안 끄집어 와도, 나만의 목록을 만들어 봐야겠다.
교회에서 기도제목이라고 하는 것도 일종의 버킷리스트일텐데..그 목록을 만들어보고 하나씩 지워가고 지워가며 얻은 결과물들을 정리하고 나눌 수 있으면 정말 좋을것 같다.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내 자녀들이, 우리 자녀들이 진로를 못찾는건 어찌 보면 당연한것 같다. 부모들도 본인들의 삶의 방향을 못잡는데 아이들이 어찌 찾아갈까? 내 아이들과 버킷리스트 만들기 연습을 해봐야겠다.

아이들과 동영상 보고, 책도 주문해야지..

http://media.daum.net/special/5/newsview?newsId=20130808030615478&specialId=5

기사 읽다가 뭉클하기는 정말 오랫만이네요.

여수 앞바다 금오도라는 섬을 중심으로 여러 학교 원어민 선생님으로 근무하는 존 맥클린톡 이라는 분에 대한 기사.

이만한 선생님.. 한국인 중에서도 찾기 어려운 진짜 선생님.

감사하고 기억하고 싶은 분이군요.

어제 노제를 마치고 밤 늦게 돌아 온 저는 곧바로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온몸이 쑤시고, 열이 나고, 목도 부었더군요. 아침 먹고 잠 들었다가, 점심 먹을 때 일어났다가 다시 스르르 잠이 들었고, 저녁을 먹고 나서야 간신히 몸을 추스릴 수 있었습니다.

아직 몸도 무겁고 슬픔도 가시지 않았지만 노제 총감독으로서의 소회를 빨리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이 글을 씁니다.


노제의 막을 열기까지

지난 일요일, 영결식과 노제의 총감독 제의을 받은 저는 기획과 연출 분야에서 저와 호흡이 잘 맞는 후배들에게 소식을 알렸습니다. 후배들은 만사를 제쳐 놓고 참여할 의사가 있음을 알려왔습니다.

노제(路祭)란?

운구행렬이 지나는 길에 돌아가신 분의 친지나 특별한 인연이 있는 장소를 지날 때, 잠시 멈추고 지내는 제사.


월요일에는 하루종일 봉하마을 장례준비위원회 측과 긴밀하게 상의했습니다. 영결식은 전체 컨셉과 프로그램에 대해 제가 점검만 하고 모든 준비는 행정안전부의 국가의전팀에서 공식적으로 진행하며, 노제는 전적으로 제가 책임을 지고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몇몇 후배들과 노제의 기본적인 구성안을 만든 저는 화요일 오전에 기획연출팀을 소집했습니다. 이희진(기획), 유기형(연출) 김태균(구성작가), 김은영(기획부), 김수진(연출부), 송태성(기획부), 조영호, 조승호(영상), 배정혜(안무) 등 역전의 용사들이 속속 모여 들어 즉시 준비에 돌입했습니다.

저는 영결식과 노제 전체의 컨셉을 "사람 사는 세상-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로 잡고 구성안을 수정해가고 출연진을 확정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주제를 그렇게 잡은 이유에 대해서는 제 블로그의 <의혹의 죽음, 그래도 여전히 화두는 "사람!">이라는 글에서 설명했습니다.

그 분은 언제나 "사람 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몸을 바쳤고, 싸웠고, 분노했고, 도전하며 살아오셨습니다. '
사람'에 대한 사랑과 비전이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비판과 비난과 조롱과 저주에도 꿋꿋이 버터 오셨습니다. '
사람'에 대한 겸손한 존중심과 높은 윤리관과 엄격한 도덕율이 있었기에, 그 드높은 이상에 상처를 입힌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부엉이바위 아래 몸을 던지신 겁니다.

김제동(1부 사회), 안치환, 양희은, 윤도현, 우리나라, 도종환(2부 사회), 안진경(추모시), 김진경(추모시), 안숙선(추모창), 장시아(유서낭송) 등 모든 분들이 두말없이 출연을 승락하고, 협조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수요일쯤 돌발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국립무용단(진혼무), 국립창극단(혼맞이 노래), 국립국악관현악단(추모 연주)의 출연에 제동이 걸린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행정안전부로부터의 협조 공문이 문화부로 안왔다는 것이었지만, 제가 파악한 상황은 정부가 국가가의전으로서의 영결식은 어쩔 수 없이 치르지만, "노제"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협조만을 하려는 방침에 따라 국립예술단체가 노제에 참가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전에 민주열사들의 노제가 거대한 시위로 변화되는 체험을 여러 번 한 터라 그에 대해 거부감과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왔습니다. 그들은 국립단체가 끼어들지 않고 민간 무용가나 연주단으로 간단한 노제가 치러지는 걸 원하는 눈치였지만, 저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각오로 얼마 전까지 저와 손발을 맞추며 일을 했던 문화부와 국립극장를 강하게 압박했습니다.

저는 국립극장장을 해봤기 때문에 최소한의 짧은 시간 안에 행사를 빛나게 해 줄 각 단체들의 역량을 잘 알고 있었고, 전적으로 저를 믿고 출연해 줄 단원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같이 화를 내며 이틀간의 실랑이를 벌인 끝에 국립무용단과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출연은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국립창극단만 단체 사정 상 11명의 단원을 다 파견할 수 없고, 5명밖에 파견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문화부도 더 이상 협조를 안하려 한다는 입장을 확인한 저는 기획진에게 국립예술단체 노조위원장의 입장을 들어보라고 했습니다. 윤석안 노조위원장은 오히려 비협조적인 극장의 처사에 화를 내며 극장장과 예술감독에게 항의를 하는 등 해결사로 나섰습니다. 결국 목요일 자정이 되어서야 모든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노제 1부의 막이 열리다.

드디어 5월 29일 오전 7시, 저는 시청광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7시에 경찰차량을 철수시키기로 약속한 경찰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었습니다.

 
한동안의 실랭이 끝에 7시 40분쯤 경찰차가 철수했습니다. 저희들은 밀려드는 인파와 수시로 발생하는 현장의 문제들을 점검하면서 10시 50분까지 리허설을 진행했습니다.


11시부터 영결식을 생중계로 방송한 뒤, 경복궁을 출발한 운구행렬이 도착하는 동안 1부 추모 공연 김제동씨의 사회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작곡가 윤민석씨가 추모 노래로 작곡한 <바보연가>를 노래패 '우리나라'가 부른 다음, 안치환씨가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마른 잎 다시 살아나> 등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가 울려 퍼지자 많은 시민들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고, 어떤 이들은 노란 색 풍선을 하늘 높이 띄워 날리기도 했습니다.


이어 양희은씨가 <상록수>를 불렀습니다. 그 노래는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노 전 대통령이 직접 기타를 치며 불러 화제를 모았던 곡이기도 합니다.


김제동씨는 “여러분의 눈빛과 풍선이 언제나 푸른 상록수와 같은 역사가 되어 아이들에 비춰지길 바란다”고 염원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이어 YB(윤도현, 허준, 김진원, 박태희)는 <후회없어>와 <너를 보내고>를 불렀습니다. 윤도현은 “그분과 함께 한 곳은 바로 ‘사람사는 세상’이었습니다. 비록 그분의 몸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분이 남긴 뜻은 가슴 깊이 담겠습니다”며 노래를 열창했습니다.

노래패 ‘우리나라’의 <다시 광화문에서>도 울려 퍼졌습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우리 다시 만나요 다시 한번 오늘의 함성 그대로 간직해요."란 가사를 담은 노래는 전 국민을 하나로 묶은 이곳을 추억하자는 의미를 담아 더욱 애절하게 들렸습니다.

김재동씨는 1부의 마지막을 유서의 내용을 나름대로 재해석한 아름다운 말로 장식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이 당신에게 진 신세가 너무도 큽니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그 분에게 받은 사랑이 너무나 큽니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그 분으로 인해 받은 행복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짐 우리가 오늘부터 나눠지겠다고 다짐합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저희가 슬퍼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슴 속, 심장 속에 한조각 퍼즐처럼 영원히 간직하겠습니다.
미안해 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이야 말로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운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님의 뜻을 저희들이 운명처럼 받아들고 가겠습니다.
화장하라고 하셨습니다. 님을 뜨거운 불구덩이에서 태우는 것이 아니라, 저희들의 마음 속의 뜨거운 열정으로 우리 가슴 속의 열정으로 남기겠습니다.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기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 가슴 속에도 조그만 비석 하나씩 세우겠습니다.




노제 2부의 막이 열리다.


마침내 1시20분쯤 노무현 전대통령의 운구행렬이 노제가 열리는 서울광장 안으로 들어서자,
광장은 이내 눈물바다로 변했습니다. 어떤 이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기도 했으며, 어떤 이는 아예 목 놓아 울기도 했고, 하늘을 우러르며 소리없이 우는 이도 있었습니다.
 


도종환 시인의 소개로 무대에 오른 저는 "지금 이 자리는 노무현 전대통령과 모든 국민들이 영원한 인연을 맺는 자리로서 뜨거운 가슴으로 고인의 넋을 맞이하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국민들과 함께 하는 국민장,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 노제를 시작하겠습니다!" 라는 말로 개식선언을 한 뒤, 크레인에 올라 타고서 "해동조선 대한민국 제 16대 노무현 대통령 복~복~복~"을 외치는 초혼 의식으로 노제의 시작을 열었습니다.

초혼(招魂)이란? 

사람이 돌아가시면 고인이 살았던 집의 지붕 위에 올라가 고인이 평소에 입었던 옷을 흔들며 하늘을 향해 고인의 넋을 알리는 의식.



이어서 향로를 맨 국립창극단의 <혼맞이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어너 어허어 넘차 어이가리 넘차 너화넘
북망산천이 머다더니 저 건너 봉화산이 북망이로구나
어너 어허어 넘차 어이가리 넘차 너화넘



비통하고 애절한 소리에 맞춰 국립무용단과 대전의 놀이패 우금치 단원들이 운구차를 한바퀴 돈 뒤 무대 위로 올라 가 진혼의식을 시작했습니다. 


죽은 자와 그를 사랑했던 여인의 비통한 슬픔을 주제로 구성된 <진혼무>가 추어지는 동안 안도현 시인의 추모시가 낭송되었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란 제목의 추모시를 통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절절한 추모의 뜻을 담아냈습니다.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
고마워요, 노무현 
아무런 호칭 없이 노무현이라고 불러도
우리가 바보라고 불러도 기꺼이 바보가 되어줘서 고마워요
아, 그러다가 거꾸로 달리는 미친 민주주의 기관차에서
당신은 뛰어내렸어요, 뛰어내려 으깨진 붉은 꽃잎이 되었어요
꽃잎을 두 손으로 받아주지 못해 미안해요
꽃잎을 두 팔뚝으로 받쳐주지 못해 미안해요
꽃잎을 두 가슴으로 안아주지 못해 미안해요
저 하이에나들이 밤낮으로 물어뜯은 게
한 장의 꽃잎이었다니요!···당신이 일어나야 한반도가 일어나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아아, 노무현 당신!




이어서 김진경 시인은 <노무현 살아오소서>라는 추모시에서 “바보 노무현, 그 작고 아름다운 상식이 꽃피는 나라로 살아오소서, 우리가 반드시 이룰터이니 그 아름다운 나라로 다시 오소서”라고 슬픔을 토로했습니다.

노무현 살아오소서

....아, 외로운 노무현

그 작고 아름다운 상식을 위한 싸움이야말로
가장 외롭고 힘든 싸움이라고
그 토닥이는 손길로 우리 다독이며 다시 살아오소서....



진혼무가 끝나고 안숙선 명창의 추모창이 이어졌습니다. 임방울 명창이 사랑했던 여인의 죽음을 애도하여 창작한 <추억>이란 노래입니다. 가슴을 후벼 파는 진양조의 비통하고 애절한 가락이 서울 광장을 울렸습니다.

추억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한데
님은 어디로 행하시는가
황천이 어디라고 그리 쉽게 가려던가
그리 쉽게 가려거든 당초에 오지나 말 것을
왔다 가면 그냥 가지
모든 터에다 당신 이름을 두고 가면서
모두에게 슬픔만 남기고 가네.....



이어 도종환 시인이 “고인의 조각난 육신으로 정의로운 것들이 하나가 되고 뉘우치고 용서하고 화합해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소망한다”는 멘트와 함께 추도 묵념을 이끌었습니다.


묵념이 끝난 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유서를 쪽방촌 출신의 사회복지사이며 시인인 정시아 님이 낭독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화장해라···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유서 낭독과 함께 대형 화면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전 영상이 펼쳐졌고, 시민들은 또 다시 눈물지었습니다.


노제의 절정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전에 즐겨 불렀던 <사랑으로>가 영상화면에서 육성으로 울려퍼진 순간이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동안에 할 일이 또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란 가사가 흘러나오자 광장은 온통 눈물 바다를 이뤘습니다.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합창을 했습니다.



권양숙 여사와 아들 노건호 씨, 딸 노정연 씨도 눈믈을 쏟아냈으며, 시민들은 잔디밭에 주저앉아 목 놓아 통곡하기도 했습니다.

합창을 끝낸 시민들은 한 목소리로 “노무현 대통령 당신을 사랑합니다”고 외쳤습니다.
노제가 끝난 뒤 대다수의 시민들은 안치환씨와 우리나라와 함께 <상록수>, <아침이슬>,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의 노래를 부르며 운구행렬을 따라 서울역으로 걸었습니다.
 



노제를 끝내고

나중에 기사를 보니 노제가 진행되는 동안 하늘에 채운이 떴다더군요.

채운(彩雲)이란?
 
여러 빛깔로 아롱진 고운 구름. 구름을 이루는 물방울이나 얼음 결정에 빛이 회절되어 고운 빛깔로 물들어 보인다.
채운은 아름답기 때문에 서운(瑞雲), 경운(景雲), 자운(紫雲) 이라고도 하며, 큰 경사가 있을 징조라고 알려져 왔다. 




저는 보지 못했지만 정말 평생에 몇 번 보기 힘들다는 오색 채운이 어렸다면, 아마도 하늘에 우리의 정성과 슬픔이 알려졌나 봅니다.


노제를 마치기까지 수십 명의 스탭들은 끼니도 거르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순간순간 발생되는 어려운 상황을 돌파해 가며, 그야말로 전쟁 같은 준비 과정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모든 출연진들과 사회자들도 점심까지 굶어가며 훌륭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주었습니다. 전 그들이 자랑스럽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구름 같이 몰려 와 뙤약볕에서 질서 정연하게 노제가 끝나기까지 함께 해주시고, 자발적으로 광장청소까지 해 주신 수많은 시민여러분, 각자의 집에서 회사에서 길거리에서 영결식과 노제를 시청해 주신 수많은 국민 여러분. 그 분들의 뜨거운 애도와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에 노제는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이들에게 뜨거운 감사와 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마 고인도 하늘에서 모든 분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보내고 계실 겁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국민 여러분,
모두모두 감사해요!
모두모두 사랑해요!    
 

들으며  사무실에서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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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님. 얼마나 긴 고뇌의 밤을 보내셨습니까?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자전거 뒤에 태우고 봉하의 논두렁을 달리셨던, 그 어여쁜 손녀들을 두고 떠나셨습니까?
대통령님. 얼마나 외로우셨습니까? 떠안은 시대의 고역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새벽빛 선연한 그 외로운 길 홀로 가셨습니까?
유난히 푸르던 오월의 그날, ‘원칙과 상식’ ‘개혁과 통합’의 한길을 달려온 님이 가시던 날, 우리들의 갈망도 갈 곳을 잃었습니다. 서러운 통곡과 목 메인 절규만이 남았습니다.

   어린 시절 대통령님은 봉화산에서 꿈을 키우셨습니다. 떨쳐내지 않으면 숨이 막힐 듯한 가난을 딛고 남다른 집념과 총명한 지혜로 불가능할 것 같던 꿈을 이루었습니다.

   님은 꿈을 이루기 위해 좌절과 시련을 온몸으로 사랑했습니다. 어려울수록 더욱 힘차게 세상에 도전했고, 꿈을 이룰 때마다 더욱 큰 겸손으로 세상을 만났습니다. 한없이 여린 마음씨와 차돌 같은 양심이 혹독한 강압의 시대에 인권변호사로 이끌었습니다.

   불의에 대한 분노와 정의를 향한 열정은 6월 항쟁의 민주투사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삶을 살아온 님에게 ‘청문회 스타’라는 명예는 어쩌면 시대의 운명이었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3당 합당을 홀로 반대했던 이 한마디! 거기에 ‘원칙과 상식’의 정치가 있었고 ‘개혁과 통합’의 정치는 시작되었습니다.

   ‘원칙과 상식’을 지킨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거듭된 낙선으로 풍찬노숙의 야인 신세였지만, 님은 한 순간도 편한 길, 쉬운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노사모’ 그리고 ‘희망돼지저금통’ 그것은 분명 ‘바보 노무현’이 만들어낸 정치혁명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님은 언제나 시대를 한 발이 아닌 두세 발을 앞서 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 영악할 뿐이었습니다.

   수많은 왜곡과 음해들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어렵다고 돌아가지 않았고 급하다고 건너뛰지 않았습니다.

   항상 멀리 보며 묵묵하게 역사의 길을 가셨습니다.

   반칙과 특권에 젖은 이 땅의 권력문화를 바꾸기 위해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았습니다. 화해와 통합의 미래를 위해 국가공권력으로 희생된 국민들의 한을 풀고 역사 앞에 사과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님이 대통령으로 계시는 동안, 대한민국에선 분명 국민이 대통령이었습니다.

   동반성장, 지방분권, 균형발전 정책으로 더불어 잘사는 따뜻한 사회라는 큰 꿈의 씨앗들을 뿌려놓았습니다.

   흔들림 없는 경제정책으로 주가 2천, 외환보유고 2,500억 달러 무역 6천억 달러,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었습니다.

   군사분계선을 걸어 넘어 한반도 평화를 한 차원 높였고 균형외교로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해 냈습니다.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쓰는 세계 첫 대통령으로 이 나라를 인터넷 강국, 지식정보화시대의 세계 속 리더국가로 자리 잡게 했습니다.

   이 땅에 창의와 표현, 상상력의 지평이 새롭게 열리고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까지 한류가 넘치는 문화르네상스 시대를 열었습니다.

   대통령님이 떠난 지금에 와서야 님이 재임했던 5년을 돌아보는 것이 왜 이리도 새삼 행복한 것일까요.

   열다섯 달 전, 청와대를 떠난 님은 작지만 새로운 꿈을 꾸셨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잘사는 농촌사회를 만드는 한 사람의 농민, ‘진보의 미래’를 개척하는 깨어있는 한 사람의 시민이 되겠다는 소중한 소망이었습니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봉하마을을 찾는 아이들의 초롱한 눈을 보며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뇌하고 또 고뇌했습니다.

   그러나 모진 세월과 험한 시절은 그 소박한 소망을 이룰 기회마저 허용치 않았습니다.

   자신의 문제에 대해선 한없이 엄격하고 강인했지만 주변의 아픔에 대해선 속절없이 약했던 님.

   ‘여러분은 이제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는 글을 접하고서도 님을 지키지 못한 저희들의 무력함이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그래도 꿈을 키우던 어린 시절의 자연인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지막 꿈만큼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인 일입니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습니까? 세상은 ‘인간 노무현’으로 살아갈 마지막 기회조차도 빼앗고 말았습니다.

   님은 남기신 마지막 글에서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최근 써놓으신 글에서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실패 이야기를 쓰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남아 있는 저희들을 더욱 슬프고 부끄럽게 만듭니다.

   대통령님. 님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님의 말씀처럼 실패라 하더라도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저희들이 님의 자취를 따라, 님의 꿈을 따라 대한민국의 꿈을 이루겠습니다. 그래서 님은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있는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대통령님. 생전에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분열로 반목하고 있는 우리를 화해와 통합으로 이끄시고 대결로 치닫고 있는 민족 간의 갈등을 평화로 이끌어주십시오.

   그리고 쓰러져가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꽃피우게 해주십시오.

   이제 우리는 대통령님을 떠나보냅니다. 대통령님이 언젠가 말씀하셨듯이, 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대통령 하지 마십시오. 정치하지 마십시오. 또 다시 ‘바보 노무현’으로 살지 마십시오.

   그래서 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더는 혼자 힘들어 하시는 일이 없기를, 더는 혼자 그 무거운 짐 안고 가시는 길이 없기를 빌고 또 빕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님을 놓아드리는 것으로 저희들의 속죄를 대신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가시는 길, 이승에서의 모든 것을 잊으시고, 저 높은 하늘로 훨훨 날아가십시오.

   대통령님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했습니다.

   대통령님 편안히 가십시오.

   2009년 5월 29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회 위원장 한명숙』
이제는 그리운 당신.

이제는 남겨진 우리의 몫.

아직도 이런 글을 보면 눈물이 난다. 애 셋인 아빠가..

난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얘기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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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호화요트는 극우 보수언론의 거짓말 물어뜯기에 대한 반어법입니다.^^ )
<* 오타 발견 : 옳바른(X) -> 올바른(O)>






자건저 타는 노간지.


한글의 위대함을 알려주는 노간지.


인디아나 노간지.


아이들과 줄다리기하는 노간지.


농촌 촌부 모델이 된 노간지.


회장님과 노간지의 만남.


네티즌이 된 노간지.


아이 울린 노간지.


신고하는 전경에 고개 숙인 노간지.


서민들과 함께 한 노간지.


아이들 눈치보며 점심먹는 노간지.


아이들에게 고개 숙인 노간지.


썰매타는 노간지.



손녀를 태우고 자건거 타는 노간지.



다정한 노간지 부부.

상록수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 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칠은 들판에 솔잎 되리라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출처] 탐진강의 함께사는세상이야기

노무현 대통령 주요 업적
1) 국가 신용등급상승 총 4단계 상승
2) 암환자 건강보험 보장률 총 20%이상 상승
3) 외한보유액 286억달러 상승
4) 주택보유율 9.7% 상승
5) 정부 R&D 예산 13% 상승
6) 육아지원예산 8000억원 이상 상승 5배이상 상승
7) 1인당 명목 국민소득 8000달러 상승(2만 달러 시대 개막)
8) 남북 인적왕래 약 10배 상승
9) 복지비율 39%상승
10) 북한 NLL침범 100회 이상 줄임
11) 국제 특허건수 1위상승 건수 1500회 이상 증가
12) 부도 업체수 90%이상 대폭 줄임
13) 전력증가 전차, 전투기, 전투함 1.7배 증가
14) 실업자수 60만명 이상 줄임
15) 기술석차 상승
16) 국가 기초 기술 상승
17) 소비자 물가 1.4 포인트 줄임(물가 안정)
18) 국가 정보 순위 11위 상승
19) 총 연구 개발비 7조원 상승
20) 공공 도서관 크게 증가
21) 미술관 증가
22) 박물관 상승
23) 종합 주가 기수 800 증가(주가 1400 시대 개막)
24) 외국인 투자 22억 달러 증가
25) 자유화 정도 FREE로 상승
26) 중소기업 현금 보유 1.9배 증가
27) 수출액 2배 이상 증가

저는 차를 가지고 출퇴근이나 외근이 많아지고, 집에서도 TV를 보지 않기때문에 라디오를 많이 듣게 되는 편입니다.
그런데, 요새 유행하는 음악FM이나 만담류들의 프로그램을 좋아하지 않다보니 아무래도 시사 쪽 프로그램들이 주요 청취 대상인데, 그중에서도 광고가 없는 KBS1표준과 CBS를 듣게 됩니다.

그런데 요새 KBS는 정권 바뀐뒤로 좀 적응하기 어려워서 cbs를 거의 고정 채널로 듣습니다.

아침 새벽기도 후에는 7시부터 9시까지 김현정의 뉴스쇼를 듣고,
가끔 외근중에는 12시 7080음악쇼랑 퀴즈쇼, 시사문제 다루는 프로그램 듣고,
저녁엔 6시 뉴스와 7시 시사쟈키를 듣고, 10시부터는 박종호의 가스펠아워~

그중에서도 변상욱대기자의 코너는 거의 빼놓지 않고 찾아 듣는 프로그램입니다.
아침 뉴스쇼의 기자수첩 코너와 저녁 시사쟈키~

과거 70,80년대 암울하던 시절, 거의 유일하게 유지되던 민주화 방송이던 CBS.
그 시절의 기치를 지금에도 어느정도 유지할 수 있는건 이런 분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아직도 차가 없어서 대중교통으로만 취재를 하시는..
촌철살인의 미학의 날카로운 연필이 되시는 비평.
어느누구도 비켜가지 못하는 그 칼날같은 비평.

변상욱기자의 블로그에서 본 모습은 젊어보이셨는데, 이 인터뷰기사 보니 많이 나이드셨네요.
하긴 세월이~~

방송 코너 한번 찾아 들어보시면 여러가지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방향을 찾을 수 있을겁니다.
신앙인으로써, 사회인으로써..

1.변상욱의 기자수첩 : 김현정의 뉴스쇼 아침 8시35분부터
2. 변상욱의 시사쟈키 : 저녁 7시 부터.

채널 : 표준FM 98.1MHz
 
 
 

 

"기자는 연필, 날카롭게 갈아야 한다."

CBS 변상욱 대기자(<시사자키> 앵커, <김현정의 뉴스쇼>의 '기자수첩' 코너 진행)는 "기자는 OO다?" 라는 질문에 "기자는 연필"이라고 답했다. 변기자는 "연필을 쓰려면 날카롭고 뾰족하게 깎아야하고 쓰다보면 또 닳아서 뭉툭해진다. 그러면 또 깎고 갈아야 한다. 항상 날카롭게 촉을 갈아놓아야 한다. 나이가 들어서 힘 빠지고 머리 희어져도 기자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깎고 갈아놓아야 한다."며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힘주어 말했다.

이어 그는 언론관에 대해서 "언론도 시대의 산물이기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 책임을 다하도록 끊임없이 자기를 개혁해 나가야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변 기자는 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83년에 CBS 프로듀서로 입사하였다. CBS가 보도기능을 빼앗긴 83년에 왜 CBS에 입사 했는지에 대해 "CBS를 좋아했지만 CBS는 정부에 의해 뉴스와 광고가 끊겨서 사람을 뽑을 거라 생각을 못하고, 타 공중파 방송 아나운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느닷없이 CBS가 PD를 뽑는다고 채용공고가 났다. 그래서 '커다란 방송사 아나운서로 간다고 해도 이런 방송환경에서는 아무래도 하고 싶은 말 제대로 못하고, 앵무새처럼 시키는 대로 할 거 아닌가? 차라리 CBS PD로 가자'"라고 생각했다며 CBS에 입사하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변 기자를 만난 날은 마침 김수환 추기경 선종 다음 날이었다. 변 기자는 87년에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 특집 방송 및 CBS 정상화 운동과 관련해 김 추기경과 얽힌 추억 한 자락을 짤막하게 꺼냈다.

메이저 언론사에 대한 아쉬움은 없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기독교방송에 들어오지 못했다면 지금의 '나'는 아마 안 만들어졌을 것 같다"고 답하고 그 이유는 "CBS에 들어와서 훌륭한 신학자, 목사님, 재야인사들, 민주화를 열망하던 많은 지식인들, 현장에서 열심히 뛰는 운동가들, 정말 내 인생에 있어서 도움이 되었던 맨 밑바닥에서 고생하는 철거민, 도시 빈민, 빚더미에 앉은 농민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저에게 진짜 세상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준 사람들을 만났다. 당시의 KBS, MBC처럼 큰 언론사에 갔다면 아마 못 만났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보다 훨씬 미흡한 인간이었을 텐데 기자로서 이름을 떨치는 것보다 오히려 그것이 더 실망"이라며 메이저 언론사에 대한 아쉬움은 전혀 없다고 답하였다.

예전의 CBS는 진보 언론으로 꼽혔지만 지금은 모호해진 것과 관련해서 변 기자는 "사회 정체성이 모호해 졌고, 한국교회 정체성도 모호해졌다. 한국교회라는 기반 위에 CBS가 서 있는데 한국교회도 민주화운동 또는 어려운 사람을 위해 힘을 쏟던 것에 비해서 지금은 '부자들만 위한 교회'나 '고소영', '강부자' 이런 식으로 비난을 받는다. 한국교회 전체의 색깔도 변했기 때문에, 기독교방송도 거기에 영향을 받는 것"이라 설명했다. 또 이명박 대통령이 장로라 그런 것이냐는 의견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하였다.

최근 쟁점 법안 중 방송법이 CBS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인지 묻는 질문에 "최악의 경우 크기를 절반으로 줄여야 하는 상황도 올 것"이라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기자 지망생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하자 변 기자는 "언론의 궁극적인 지향은 인간이다. 사람을 제대로 보고, 사람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고, 사람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하라"고 충고했다.

다음은 변상욱 기자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기자는 OO다? 이유와 더불어 기자님의 언론관에 대해서 말씀 부탁드려요.

기자는 연필이라 생각합니다. 쓰려면 항상 날카롭고 뾰족하게 깎아야하고 쓰다보면 또 닳아서 뭉툭해집니다. 그러면 또 깎고 갈아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힘 빠지고 머리도 희어져도 기자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깎고 갈아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자는 연필이라 생각합니다.

언론은 절대적인 지위를 지니고 있어서는 안 돼요. 물론 다른 권력이 언론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해서도 안 되죠. 언론도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 나라 사람들에게서 태어나는 시대적 산물입니다. 그 나라 사람들이 잘 못 살면 잘 사는 쪽으로, 그 나라가 불평등하면 평등한 쪽으로, 언론도 자기를 탄생시킨 그 나라, 그 시대 사회상에서 벗어나면 안 되고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언론이 겸손해야 합니다. 시대로부터 태어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 시대에 책임을 다하도록 끊임없이 자기를 개혁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하고 83년에 입사해 PD를 하셨죠. 그런데 83년이면 CBS에 보도기능이 사라졌을 때인데 왜 CBS에 입사하셨는지 궁금하네요.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해서 MBC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CBS를 좋아했지만, CBS는 정부에 의해 뉴스와 광고가 끊겨서 사람을 뽑을 거라 생각도 못했습니다. MBC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CBS가 PD를 뽑는다고 채용공고를 냈어요. 그래서 '지금 아나운서로 간다고 해도 이런 방송 환경에서는 아무래도 하고 싶은 말 제대로 못하고, 앵무새처럼 굴 거 아닌가? 차라리 CBS PD로 가자.' 그래서 갔죠. PD로 뽑혔는데 CBS에서는 그중에 한 명을 기자로 활용할 생각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 테스트를 거쳐 신입 PD 중 제가 기자로 뽑혔습니다. PD, 기자 직무를 동시에 배우고 PD, 기자를 절반씩 했습니다.

그럼 원래 기자가 꿈이 아니셨나요?

기자가 꿈이라기보다는 '언론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었고, '신문보다는 방송이 나에게는 적합하다'고 생각했죠. '아나운서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는데, 물론 암울한 저널리즘의 현실로 고민은 했죠. 그렇다고 기업체에나 그런 곳에 들어가고픈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CBS PD면 나의 신앙적 갈망과 내가 좋아하는 저널리즘의 영역이 잘 결합돼 있으니까 괜찮겠다'고 생각했죠. 지금은 기자로 남았는데, 뭐 하나님이 인도하신 대로 왔습니다(웃음).

기자생활을 하시면서 재밌는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아요. 그중 생각나는 것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1987년 1월 박종철 군 고문 치사사건이 있었을 때 돌아가신 김 추기경께서 '도대체 이 정권은 도덕성이 있는거냐?'고 전두환 정권을 향해 일갈하셨죠. 그 말씀에 힘을 얻어 '고문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라는 제목의 특집 생방송을 만들었어요. 결제와 준비를 끝냈는데, 정부가 압력을 넣는 통에 경영진이 음악만 틀고 특집은 방송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제작진들은 고민하다 동료들과 힘을 모아 간부 선배들을 내몰고 방송실 문을 잠그고 책상과 의자로 바리게이트를 쌓고 방송을 시작했죠. 방송 중에 밖에서는 동료들이 인간 띠를 만들어 방송실을 지키고 그러면서 1시간 15분 정도 항명방송을 했습니다. 그 후 기자직을 박탈당했어요.

그런 뒤에 얼마 지나 김 추기경께서 CBS에 출연 하셨어요. 'CBS는 뉴스와 해설을 제대로 방송할 수 있어야 한다. 자유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정부가 빼앗아 갔다 돌려줬다 이럴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해 주셔서 정말 힘이 됐습니다. 그렇게 걸핏하면 기자직에서 쫓겨나곤 했어요. 제가 기사 쓰는 것이 금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거 하다 정부가 감시를 소홀히 하면 다시 돌아와서 기자 노릇을 하고, 제가 만들어도 다른 사람 이름으로 프로그램이 나가고 그러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재밌었어요(웃음).
 
기자님 스타일을 보면 CBS가 아니라 MBC나 KBS 같은 메이저 방송으로 가셨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 것 같은데 아쉬운 생각은 안 드세요?

아쉬운 생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게 맞을 겁니다. 물론 더 큰 공중파 방송으로 갔으면 방송인으로서 또 다른 삶이 펼쳐졌겠죠. 그렇지만 기독교방송에 들어오지 못 했다면 지금의 나는 아마 안 만들어졌을 겁니다. 방송국에 들어와서 훌륭한 신학자, 목사님, 재야인사들, 민주화를 열망하던 많은 지식인들, 현장에서 열심히 뛰는 운동가들, 정말 내 인생에 도움을 준 맨 밑바닥에서 고생하는 철거민, 도시 빈민, 빚더미에 앉은 농민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큰 방송사로 갔다면 저에게 진짜 세상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준 사람들을 아마 못 만났을 겁니다. 기독교방송에 있었으니까 매일 그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꺾이고 다듬어 져서 오늘 이 모습이 된 것이죠.

전 변변찮아도 나쁘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이보다 훨씬 미흡한 인간이었을 텐데 기자로서 이름을 떨치는 것보다 오히려 그것이 더 실망일 겁니다. 좌우명이 '세상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명예나 공명심을 좇아도, 나만은 홀로 소나무처럼 푸르리라 (世追名 我獨松)'입니다. 물론 실천하기 어렵고 부족하지만 목표는 이렇게 해서 가야죠. 다만 한겨레신문 발기위원인데 신문 창간 때 고민했습니다. 한겨레신문에서 왜 안 오냐고 빨리 와서 함께 하자 할 때 잠깐 고민 했죠. 하지만, 신문보다는 방송일이 나에게 맞는 것 같아서 안 갔습니다.

   
 
  ▲ 변상욱 기자는 "기자는 □다" 라는 질문에 "기자는 연필"이라고 답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시간이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는 얘기들을 합니다. 기자님은 5공 때 기자생활을 시작했는데 그때와 비교해 보면 어떤가요?

5공화국 때와 비교하면 지금 기자 생활이 훨씬 더 안전하고 편한 건 사실입니다. 그때와 비교 하는 건 무리가 있죠. 다만 박정희 유신정권부터 본격화된 언론 탄압이 쭉 이어지면서 그래도 뭔가 조금씩 민주화를 향해서 역사의 흐름이 진행되고 있는 중 아닙니까. 민주화 이후 권력과 언론의 관계는 때리며 압박하고, 당근을 주면서 회유하는 관계에서 조금씩 서로 견제하는 정상적인 관계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서는 이것이 거꾸로 되돌아가서 다시 압박하고, 대형 보수신문처럼 마음에 드는 언론사, 말 잘 듣는 방송에게만 당근을 줍니다. 그리고 말 잘 들을 수밖에 없는 재벌에게 방송을 주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역사의 흐름이 뒤로 가니까, 5공 때보다는 상대적으로 낫다고는 하지만 가던 걸 되돌아가는 것이 참기가 어려운 거죠. 역사가 진보해야 되는데 후퇴하니까요.

매일 기자수첩을 즐겨 듣곤 합니다. 근데 듣다보면 속은 시원한데 이러다 다시 못 듣는 것 아닌가 걱정 할 때가 있습니다. 준비하면서 그런 염려는 안 드시나요?

걱정 없습니다. 권력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숨겨놨는데 툭 터뜨리는 것, 예를 들면 X파일, 삼성 비자금 이런 것들입니다, 그 다음에 'PD수첩' 같이 사건을 크게 확대시키는 것, 이런 비판과 반발을 모아 조직화해 운동으로 끌고 나가는 것을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기자수첩은 남들이 밝혀놓은 사실들을 모으고 골라서 새로운 사실을 끌어내거나 논리적으로 정리해서 증명해보이거나, 비꼬는 것이니 정부나 권력이 관심 크게 안 쓸 겁니다. 제가 또 '사람들을 어디로 갑시다. 모입시다' 선동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저에 대해서 관심 없을 거예요(웃음).

하지만 한미FTA 사태 후 수위가 높았던 것 같던데….

기자수첩은 본래 권력을 비꼬고, 풍자하고, 꼬집는 것을 주목적으로 기획한 코너입니다. 경험 많은 저에게 맡긴 것은 명예훼손이나 프라이버시 침해 등 자칫 넘어서기 십상인 경계선에 걸쳐가며 알아서 잘 하란 취지입니다. 잡혀 갈 듯 말 듯 더 아슬아슬하게 하라고 요구합니다. 사실 저는 점잖은 사람인데, 더 아슬아슬 하게 하라고 자꾸 그러니… (웃음). 방송사가 하고자 하는 것이니 별 문제는 없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진보언론이라면 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를 꼽고 추가한다면 MBC를 말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70~80년대 진보언론에 CBS가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전두환 정권은 CBS에서 보도기능을 빼앗아 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재 CBS의 위치는 어정쩡한 듯합니다.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 하세요?

조직은 처한 상황과 구성원들에 따라서 움직임이 달라집니다. 5공화국 때 CBS는 정권에 의해서 자유와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CBS를 지키고 싶었던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 곳이었죠. 청취자들도 정치적 차이는 있겠지만 그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질성이 강했죠.

그런데 민주화 이후에는 여러 사람들이 뒤섞이고 CBS의 역할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민주화 되지 않았냐? 기능도 정상화 되지 않았냐? 그래서 이제는 정부 비판보다는 사회 통합이나 화합 또는 복음 전파 이런 것들에 조금 더 신경 쓰면 안 되겠냐? 정부 비판하는 것은 독재 정권 때나 하면 되는 거지 지금도 그렇게 하냐?' 그런 요구들도 많아지고 CBS를 둘러싸고 있는 방송환경이 바뀌고, CBS 내부 구성원들도 예전 같은 동질성은 훨씬 적습니다.

그건 KBS나 MBC를 봐도 금방 알 수 있어요. KBS는 예전에 국영방송 공무원들과 방송공사로 바뀌면서 뽑은 공채, 각종 특채, TBC 상업방송 출신, 막 뒤섞여 지금까지 왔습니다. 반면에 MBC는 주식을 강제로 빼앗겨본 경험도 있는데다 민주화 이후에 철저히 반성하고 새로워지려고 공부하는 걸 지켜봤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의 반성이 지금도 'PD수첩'이라든지, 'MBC뉴스데스크'라든지 이런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고, 그 사람들을 둘러싼 법과 제도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그 방송사의 색깔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법을 잘 만들고 제도를 잘 만들어야 되는데, 법과 제도를 거꾸로 돌려놓으면 무너집니다. 그런 점에서 CBS의 지금 정체성이 조금 모호해진 것은 사회와 한국교회 정체성이 모호해졌고 내부 구성원의 정체성과 동질성이 흐려진 데 따릅니다. 한국교회라는 기반 위에 CBS가 서 있는데 한국교회도 민주화운동 또는 어려운 사람에게 힘을 쏟던 것에 비해서 지금은 '부자들만 위한 교회'나 '고소영', '강부자' 이런 식으로 비난을 받지 않습니까. 한국교회 전체 색깔도 변했기 때문에, 기독교방송도 영향을 받는 겁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장로라 CBS가 눈 감아 주지 않느냐는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명박 대통령이 장로라고 해서 CBS가 특별히 바뀌거나, 흔들리거나, 움직이는 건 없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김영삼 대통령도 장로였으니까 그때부터 난리가 났을 것인데 그렇지 않았거든요. 아마 내부적으로는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 김영삼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 김대중 대통령을 더 좋아하는 사람, 나름 이명박 대통령을 조금 믿어보자는 사람 등 여러 가지 성향의 사람이 섞여 있겠죠. 그래도 CBS 전통을 유지해 나가면서 어떻게든 하나로 모아가는 중이고, 그런 점에서 고참인 제가 중심을 잘 잡아야겠죠.

기자로서 방송법에 관심 가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MBC와 KBS2 민영화가 부각되는데, CBS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방송법이 CBS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 일까요?

정부가 기독교방송을 비롯해서 종교방송이나 또는 작은 지역방송들에 대해서 지원책을 마련 않고 방송법이 통과 돼 제도가 만들어 진다면 CBS는 최악의 경우 크기를 절반으로 줄여야 하는 상황도 올 겁니다. CBS는 선교방송으로서 선교, 보도, 교양의 종합방송을 지향하고 전국 네트워크를 갖고 있습니다. 선교방송이 이런 모습인 것은 지구상에서 CBS가 유일합니다. 이것을 유지 하려면 어느 정도의 기반이 마련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 기반이 되는 틀을 갑자기 흔들어 버리면, CBS는 위기를 맞겠죠. 정부가 말로는 '나름대로 국민의 기대를 안고 있는 CBS를 그렇게 안 되도록 따로 지원을 하겠다'고 하지만 공공성과 공정함을 갖춘 경쟁의 틀만 유지해주면 CBS가 살 길을 열어갈 겁니다. 따로 지원받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만 해도 되는데 굳이 방송이라고 하는 틀을 재벌 신문사, 또는 재벌에게 주겠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러면 당연히 경쟁력이 없는 방송사나 언론사의 희생을 무시하겠다는 것인데, 그런 틀은 지금 안 됩니다. 미국도 재벌의 방송참여를 처음 허용할 때는 조금만 허용하고 감독을 철저히 하겠다고 하다가 결국 재벌의 손으로 완전히 넘겨지고 신문방송이 모두 상업적이고 수구적인 조직으로 변했습니다. 이라크 침공, 미국 신자유주의 경제의 붕괴도 언론의 감시가 허술한 데서 연유한 부분이 큽니다.

방송광고공사(코바코)를 건드리는 것은 CBS를 잡아보겠다는 의도 아닌가요?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정부의 기본적인 틀은 방송을 하나의 산업으로 보고 그 산업에 재벌을 참여시키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신문 시장이 심각히 축소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현 정권이 의지하고 있는 보수 신문들도 위험합니다. 그들의 살 길을 열어주고자 방송으로 진출해서 또 다른 사업을 하도록 하려는 의도입니다. 두 가지 큰 목표가 있는데 최근 드러난 것은 보수 신문 살리는 것에 더 비중을 두는 모양입니다. 그러려면 CBS라든가 지역방송, 지역신문들의 몫을 대폭 내놓고 뒤로 후퇴시키려는 게 기본 구상인 것 같아요. 그런데 그 희생 시키는 것이 바로 국민을 위한 공익성이나 공공성을 훼손하기 때문에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경남 도민일보 김주완 기자는 '1인 미디어 시대, 블로그 10만 양병설'을 주장을 했어요. 블로그가 새로운 언론으로 가능성이 있을까요?

블로그가 지금보다 훨씬 더 성장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문제는 언론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생겼듯이 블로그도 좋은 것과 나쁜 것, 인기를 끌기 위한 상업적인 블로그가 수없이 생겨날 겁니다. 그 안에서 그것들을 정리해낼 수 있는 웹 2.0시대 또 다른 언론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역할을 지금의 언론들이 맡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예전 같으면 기성언론이 정보를 많이 그리고 빨리 전달해 주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이제는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 중에서 또는 서로 자기의 주장을 펼치는 블로거들 중에서 어떤 게 옳고 가치가 큰 것인지 국민들이 효율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평가하고 검증해 주는 역할을 언론이 떠맡아야 할 겁니다. 그래서 기성 언론이 거대하게 자리 잡고, 옆에서 블로그들이 보완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블로그가 점점 커지고 언론이 블로그를 보면서 블로그를 정리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CBS 이정식 사장이 신년사에서 "금년 CBS는 보도pp, 종합편성pp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순간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현행방송법으로는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정식 사장은 정부가 추진하는 방송법에 동의한다는 의미인가요?

방송 기술이 발전하면서 채널은 자꾸 늘어납니다. 새로이 생겨나는 채널마다 지금 방송사들이 다 가질 수는 없고 나눠야 합니다. CBS는 새로 시작 되는 채널과 미디어 중에서 CBS가 강점을 갖고 있으나 미약한 부분, TV 뉴스 쪽에 관심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보도pp, 종편pp 이런 것들이죠. '라디오 뉴스는 오랜 경험이 있고, TV도 위성TV로 경험을 쌓았으니, 이제는 TV뉴스 보도를 해봤으면 좋겠다'는 것이 CBS의 사업적인 목표입니다, 다만, 방송 영역이 넓어지고 기술에 의해서 채널이 생겨서 나누더라도 '그것을 공정한 경쟁이 불가능 하도록 재벌이나, 보수 신문들에게 정부가 밀어주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죠.

그럼 한나라당이 개정 하려고 하는 방송법하고는 관계가 없나요?

관계있습니다. 종합PP, 보도PP를 목표로 할 때 누가 가장 적합한 사업자인지 공정히 겨뤄서 결정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내놓은 것은 경쟁 자체가 무의미한 것입니다. 보수 신문이 재벌하고 손을 잡고, 누구도 따라 올 수 없을 만큼 독점한 시장 구조를 만들면서 그 안에서 경쟁 하라고 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보도PP, 종합PP는 성격 상 공익을 위해서 공공성을 갖고 공익을 위해 책임을 수행할 수 있는 사업자에게 주는 방식으로 주어야 합니다. 지금의 준공영제에 의한 한국방송의 기본 틀이 어느 정도는 유지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럼 방송법은 이전부터 개정할 계획이었나요? 현행 방송법 안에서는 그것이 안 되죠?

그것이 상당히 애매하거든요. 방송광고공사만 해도 전두환 5공 정권은 방송 구조를 확 바꿔 놓으면서 방송광고공사를 이용해서 방송과 방송 시장을 관리했습니다. 이것이 민주화 되고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되니까 전두환 정권이 만든 구조가 나름대로 자기 자리를 찾으며 한국사회 현실에 적응했습니다. 그래서 방송이 광고를 쥐고 있는 대기업이나, 돈의 영향을 직접 안 받고, 중간에 광고공사가 스크린을 하는 순기능을 하게 된 거죠. 이것을 '전두환 때 만든 것 아니냐? 없애야 한다’하는데 지금은 공익성·공정성을 보장하는 틀로 꽤 괜찮은 구조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가다듬으면서 새로운 방송 기술 발전 결과를 접목 시키고 시장을 조금씩 넓혀 나가면 되는데 이것을 뒤집어 자기들 정권의 입맛대로 바꾸려고 하니까 문제죠.

그럼 공정경쟁을 한다는 전제 하에 CBS가 이들 채널을 가져 올 가능성은 있나요?

지금 한나라당이 밀고 가는 저 상황에서는 가져오기 어렵습니다. 공정하게 한다면, 물론 CBS는 자금이 충분치는 않으니까 컨소시엄을 구성할 겁니다. 재정과 경영에서는 다른 쪽의 도움을 받지만, 방송 내용만큼은 CBS의 전통을 살려서 공정하게 하는 컨소시엄을 구성하겠죠. 경인TV방송도 그런 구도로 가져가려 했는데 변수가 생겨 참여하지 못했고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던데 아쉽습니다.

만약 CBS가 그 사업을 하려 한다면 한국교회에서 헌금으로 할 수 있지 않나요?

보수적인 대형교회들의 지원이 커져 그 입김이 뉴스 보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한국교회가 소유한 언론들을 한국교회 스스로 구조조정하고 정리하는 겁니다. CBS, 극동이 지금처럼 제각각 전국에 지역방송 연주소, 송신소를 두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한국교회가 다 먹여 살려야 하니까 낭비입니다.

CBS는 시사·교양·보도 뉴스, 극동은 선교 복음, CBS의 음악fm은 음악, 역할분담이 필요합니다. CBS 와 CTS가 무한경쟁을 벌이는 것도 무리입니다. 하나의 TV로 함께 방송하면 유지비용도 훨씬 덜 들 겁니다. CTS 설립 당시로 거슬러 가자면 당초 CBS의 명분에 재벌그룹이 자금력으로 도전하면서 엉뚱한 곳으로 사업자 허가가 가버렸고 한국교회가 모은 헌금 300억 원을 쏟아 부었는데도 살리지 못해 지금은 개인 소유의 방송이 되어버렸습니다.

한국교회가 마음을 열고 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방안을 마련하면 라디오에서는 CBS와 극동, TV 에서는 CBS와 CTS, 한국교회가 지금보다 힘을 덜 들이고도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데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분열 되어 있고 너무 제각각 자기 이익만 추구 하니까 힘을 모아내기가 어렵습니다. 아마 운영이 어려워져서 한국 교회의 방송 미디어들이 위기에 처한다면 그때는 정신 차리고 할지도 모르죠. 지금은 안하려고 할 겁니다.

96년에 <언론 가면 벗기기>라는 책을 내셨더라고요. 인터뷰 준비하면서 읽었는데 언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어요. 예전 얘기들이라 지금 상황에 안 맞는 것도 있었고요. 또 책을 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본래 권력과 언론의 밀고 당기기에 관한 책을 각 정권 때마다 한 권씩 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김영삼 정부 때 내고 나니까 너무 힘이 빠지더군요. 그 이후 것은 노트에 메모로만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글을 써 남기는 것에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글보다는 말로, 말보다는 침묵으로, 침묵보다는 삶으로 옮겨가라'는 가르침에 따라 살기로 했거든요. 글로 쓰면 자꾸 멋있게 쓰게 되잖습니까. 그러지 않으면 되지만 그럴 만큼 야무지지도 못합니다.

단순하고 소박한 진실 쪽으로 삶을 옮겨 놓으려 합니다. 사람을 쳐다보고 말하는 것이 좋고, 말보다는 입을 닫고 서로 손을 잡고 끄덕끄덕 하는 침묵이 좋고, 열심히 실천하고 땀 흘리는 그런 삶으로 가고 싶습니다. 책을 안 쓰고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 '빨리 써야 되는데' 이랬는데, 이제는 안 써도 된다는 확신 같은 것이 생겼습니다. 아마 안 쓸 겁니다. '기자수첩' 원고가 많이 쌓였고 여기 저기 칼럼 쓴 것도 한 200~300편 쌓여 있고 그래서 책을 만들자는 사람들은 있죠. 이미 원고가 나와 있고 사람들에게 공개했던 것이니 누가 가져가 책 만드는 데 쓰겠다면 그것은 가능 하겠습니다.

앞으로 계획은 무엇인가요?

CBS에 있는 동안은 계속 기자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 말 하면 사람들이 잘 안 믿어요. (웃음) 사장이요? 전혀 생각 없습니다. 별로 존경하지도 않는 목사님들에게 고개 숙이며 헌금 달라고 사정하고…. 그런 힘든 일은 사장, 상무할 사람에게 맡기면 되고, 나는 할 줄 아는 일이 기자니까 계속 하면 좋겠고, 기자직 말고 다른 목표가 있다면 그래도 지금까지 해왔던 기독교 영성과 저널리즘을 결합시킨 이야기꾼 정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후배들과 학생들을 만나서 내가 그동안 추구해 온 기독교 영성과 저널리즘을 결합한 나만의 이야기를 전한다거나 내 나름대로 바라 본 세상 이야기를 들려준다거나 하는 친절한 이야기꾼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지금도 대학 강의 나가서 학생들 만나는 게 즐겁습니다. 그것도 거창하고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어가고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기자를 꿈꾸는 지망생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저널리즘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인간입니다.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 인간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고 인간은 어떻게 적응하고 저항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가 하는 그 정황이 기자의 궁극적인 관심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시청에서 낡은 수도관을 바꿔준다. 거기에 돈 5억이 든다'라고 자료가 나오면 '서울시가 5억을 들여 낡은 수도관을 바꾸어줬다'라고 쓰겠죠? 그러나 '그동안 녹슨 수도관 물을 먹고 살아 온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들의 호소는 왜 무시되어 왔을까'라고 사람에게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기자들이 새로운 정보만 생각을 하다 보니 정책이나 외형에만 집중하게 되는데, '세상에서 제일 높은 빌딩을 잠실에 세운다거나 강을 이어서 멋진 대운하를 만든다' 이런 게 아니라 거기에서 살아가는 생명, 특히 인간에게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인간도 다 믿을 수 없으니 인간을 먹여 살리는 자연과 생명을 품고 있는 환경에 대해서도 관심을 넓혀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 자체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는 비인간적인 상황이 저널리즘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자가 되려는 후배들에게 충고 한다면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지향한다. 사람을 제대로 보고, 사람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고, 사람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하라'고 충고하고 싶습니다.

바타와 삼부, 곰보수레와 바트델거



그들은 신도림역 근처 신축 공사현장에서 11명의 목숨을 구하고 사라졌던
몽골인 불법체류자!!! 4인의 이름입니다.
도망가던 계단에서 들려오던 목소리에 뒤돌아 내려가 온몸에 땀이 젖도록 유해연기속을
뛰어다니며 구해내던 그 상황이 그대로 상상이 되는군요.
우리는 그들을 불법체류자로, 못사는 나라에서 돈벌러 온 허접스러운 존재로
인식하는 그 순간에, 그들은 자신들과, 우리와 동일한 생명으로 사람을 보고
생명을 던져 그 연기속으로 들어갔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생명이라는 하나님이 주신 그 고귀한 존재에 대해
나는 혹시 등급을 메기고 있던건 아닌지...
그건 꼭 외국인노동자 뿐 아니라,
내 아들의 친구들
직장 동료들,
친척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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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EBS 지식채널e "바타와 삼부, 곰보수레와 바트델거"

!@#… 감동의 코드에 관하여. 영국의 스타만들기 장기자랑 프로그램, Britain’s Got Talent가 요새 동영상클립계(낮간지럽게 UCC 운운하는 것들은 도대체 뭐냐)에서 화제다. 요새 보니 6살 꼬마의 무지개타령 - Somewhere over the rainbow - 때문에 일부에서 화제되고 있더라는. 그래, 재능 좋지. 훌륭한 천부적 재능은 감동적이다. 일종의 기인열전 같은 것. 모 신문에서 기사화도 되어있는 듯 하다 (아니, 경제신문에서 로리 스타 탄생에 관심을?).

!@#…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큰 감동은, 이야기와 삶의 때가 묻어있는 경우다. 6살소녀와 달리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잘 이야기되고 있지 않은 듯 한데, 같은 프로의 이전 방영분에 출연했던 카폰 판매원 아저씨 Paul Potts 동영상이다. 일명, Opera Guy. 왠 허름한 차림의 순박한 시골청년처럼 생긴 뚱땡이 아저씨가 이 장기자랑 코너 1차 예선에 나와서, 시큰둥하고 공격적이기로 유명한 심사위원들이 “그래, 당신 뭐해볼래?” 하니까 “저… 오페라를 부를까 합니다”라고 소심하게 답변. 프로그램 속성상, 오페라라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뭔가 오페라를 패러디한 썰렁한 개그 개인기를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가라앉은 분위기. 그런데… 아저씨 표정이 심히 긴장하더니, 이내 본색을 드러낸다.

!@#… 오페라 투란도트 중, ‘공주는 잠못들고’(Nessun Dorma… 실제 뜻은 ‘잠들지 말지어다’). 압도적인 발표를 마친 후 그 담담하면서도 뭔가 해냈다는 기쁨이 섞인 표정. 왠지 탄광촌 발레리노 빌리 엘리엇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카폰 가게 점원 테너의 인생역정이 담겨있는 듯한 순간이다. 그 코드는 순식간에 좌중에 퍼져서, ‘감동’이 된다. 그리고 그 감동은 유튜브를 타고 며칠만에 세계의 영어가능 인터넷 인구들을 사로잡고 말았다. 대략 순위권.

!@#… 그런데, 뒷이야기를 더 찾아보니 이 사람 사연, 더욱 장난이 아니다. 알고보니 이 사람, 더 젊었을 때 오페라에 열의를 가지고 이태리로 가서 두 차례 오페라 여름학교 수료. 많지 않은 공식 교육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프로 오페라 활동을 시작…했으나, 안습 상황의 연속이었다. 충수 파열, 부신에 무려 10cm 짜리 종양 발생, 자전거오 토바이 사고로 쇄골 박살. 한마디로, 성량 모으고 지구력으로 버티는 오페라 성악을 심히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고들의 연속. 결국 오페라를 접고 생업에 매진했다. 그러나 결국 꿈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연습을 시작, 이 TV 장기자랑 프로그램을 마지막 기회로 삼기로 결심하고 출연. 즉, 삶의 때가 잔뜩 묻어나오는 드라마틱한 도전과 좌절과 성공의 스토리. 동영상으로 처음 접할 때는 압축된 코드(동네점원 - 오페라 꿈), 그리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한층 더 파고 들면 더욱 강력한 이야기 구조 (꿈 - 도전 - 좌절 - 생업 - 바닥부터 재도전 - 성공).

!@#… 어떤 기인열전 재능쑈를 하더라도, 결국 인생의 굴곡을 담아내는 정통파 감동의 깊이를 따라잡지는 못한다. 아무리 1분 이내 5줄 이내에 날 자극해보라는 식의 사고방식의 “스낵문화“(Wired지의 표현)가 지배하는 오늘날이라고 할지라도, 변한 것은 틀 뿐. 그 안에 담겨서 결정적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코드는 결국 그대로다. 언론쟁이들도, 대중서사예술쟁이들도, 그저 개인 블로거들도 한번쯤 다시 새겨봄직한 단순한 진리를 떠올리게 해준 일화.

– Copyleft 2007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PS. (약간 추가) 앞서 이야기한 이태리 서머 클래스 외에, Pavarotti에게 Master class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master class는 무슨 개인교습 사제지간 성립 뭐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명사 특강, 정도일 뿐이지 (예를 들어 Pavarotti의 master class가 얼마나 부실한지(…)는 여기에 소개되어 있다). 결국 전체 스토리는 조금도 변함없다.

PS2. (6.18추가 애프터서비스) 두어시간 전에 한 최종집계 결과 발표. 결국 오페라 청년이 6살 여자애, 원숭이 인형 등 혁혁한 강적(!)들을 물리치고 우승. 영국 여왕 앞에서 공연하게 되었다.

여전히 복잡한 표정의 오페라 가이, 역시 감정을 관리하기 힘든지 Nessun Dorma 풀버전 앵콜 공연에서 목소리가 다소 떨림. 하지만 그보다… 가장 강력한 독설가 심사위원 사이먼, 눈물을 글썽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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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Potts -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en Dorma)
핸드폰 세일즈맨 몰포트씨의 결승곡.
예선에서 불렀던 이곡으로 우승했습니다.
이제 여왕님 앞에서 공연하고, 앨범도 내겠군요.
가지고 있는 재능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연습하고 노력해서,
결국은 열매를 맺게 되는군요.

모든 사람들이 해야하는걸 해야하고, 그들이 가는길을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줄 맞춰가야 하는게 전부인 세상에서
비록 그 줄에서는 좀 벗어나도, 또는 그 줄의 뒤에서 겨우 따라가도,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면 그보다 더 큰의미가 어디있을까
싶은걸 깨닫게 해주는 또 하나의 표본이군요.



 
감동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오페라 청년 'Paul Pot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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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6살 소녀 코니 탈벗양의 모습도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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