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 2015 학습/세례/입교/유아세례식 서약서

나도 이런 비슷한 내용으로 서약하고 학습/세례 받았을 터인데 이렇게 믿고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이렇게 아이들을 키우겠다고 다짐하며 유아세례를 아이들에게 주었을 터인데 이렇게 양육하고 있는가?

라는 확인을 매 순간 하고자 남겨 놓음.

이번 고난주간 동안 우리 교회에서는 각 교역자분들이 하루씩 가상칠언을 맡아서 설교 하고 계시는데, 역시 교계 신문에 나온 자료를 올려 봅니다.

2009/04/09 - [믿음, 신앙, 교회] - 예수님의 부활 - 그 일주일간의 행적
2009/04/09 - [믿음, 신앙, 교회] - 예수님의 부활 - 십자가 이전 시간별 사건
2009/04/09 - [믿음, 신앙, 교회] - 예수님의 부활 - 십자가상의 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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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서 하신 말씀 중 일곱 마디가 성경에 기록되
어 있다. 그 말씀들은 사복음서에 흩어져 나타난다. 가상칠언의 순서는 중요
한 구속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수님의 가상칠언은 창조와 구속의 과
정 및 완성에 이르는 전체적인 역사적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예
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말씀하신 가상칠언에 대해 체계적으로 살펴 보았다.



1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
(눅 23:34) - 아담의 타락과 죄의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함
이 말씀에서 성자와 성부의 교통하심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
는다. 주님께서 “아버지여!”라고 하셨을 때 천지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
나님을 염두에 두게 된다. 그리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범죄한
인간들을 떠올리게 된다. 사탄으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악한 인간들이 거룩
하신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를 욕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죄에 빠지게 된 것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말미암았다. 그러나 하나님
께서는 자기 백성을 죄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들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구속 사역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메시아
로 오신 주님께서 인간들로부터 고통당하시면서 인간의 죄에 대한 용서를 간
구하고 계신다.
주님께서 저희를 용서해 달라고 하신 것은 그 죄를 모든 인간들에게 돌리지
는 말아달라는 간구의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택하신 자기 백성들 역시 ‘저
희’ 속에 포함된 인간이지만 그들에게 그 죄를 돌리기를 원치 않으신 것이
다.

2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 에덴동산의 상실과 낙원의 약속을 기억함
이 말씀에서 처음 인간 아담과 하와가 상실한 낙원을 떠올리게 된다. 인간
은 범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들
이 낙원에서 쫓겨남으로 말미암아 그 자손들은 아예 낙원 밖에서 죄 가운데
출생하게 되었다.
구약성경에서는 낙원에 관한 교훈을 지속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죄로 말미암
아 상실한 낙원이 하나님으로 인해 다시금 완벽하게 회복되는 것이 구약에
계시된 복음의 내용이었다. 아브라함에게 메시아를 언약하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그 낙원을 약속하셨다.
그 낙원이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더불어 눈앞에 확증적으로 드러나
게 되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첫 사람 아담이 상실한 그 낙원
을 완벽한 모습으로 회복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자기와 함께 십자가에 달
린 한편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
리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한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사실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아들여야 할 중요한 교훈이다.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 -
‘여자의 후손’에 관하여 기억함
이 말씀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언약하신 ‘여자의 후손’과 ‘마리아의 아
들’이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 여자의 후
손’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통하시는 가운데 육신적으로 자기를
출산한 어머니 마리아를 대면하고 있다. 그녀는 주님의 제자와 함께 찢어지
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있다. 거기 수많은 민중들이 모여 있지만 그들은 다
른 사람들과 완전히 구별되는 모습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구약성경에서 약속된 ‘여자의 후손’의 임
무는 완성된다. 그러므로 그 여자의 후손으로서 ‘아들’의 임무가 성취된
다. 따라서 인간의 몸을 입은 예수를 출생함으로써 어머니의 자리에 있던 마
리아의 역할 역시 완성된다.

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 27:46) - 성
육하신 주님을 기억하게 됨
이 말씀에서 성육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강림하신 주님의 은총을 보게 된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면서 더
럽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은 순전히 창
세 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을 구원함으로써 영원한 영광을 회복하시고자 한
하나님의 뜻 때문이었다. 이 말씀은 성육신에 대한 구약에 기록된 예언의 성
취이다.
이 말씀 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경륜을 볼 수 있
다. 즉 천상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만 하 그 놀라운 뜻을 헤아리게 된다. 구약성경에서 언약된 이사야서의 ‘고
난의 종’에 대한 의미가 이 말씀 가운데 확증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십자가에 달리신 인간 그리스도에게 임함으로써 자기 백성들에 대한 구속 사
역을 완성하시게 되었다.

5 “내가 목마르다”(요 19:28) - 인간의 몸을 입으신 주님의 고통을 기억

이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모습을 여실히 보게 된다. 하늘의 영
광스런 보좌를 버리시고 고통스런 인간의 옷을 입으시고 친히 인간의 고난
을 체휼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사탄의 손아귀에서 구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주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모든 고통을
감당하셨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은 만신창이였음에 틀림없다. 육신의 고통과 만
천하에 드러나는 그 모습은 엄청난 치욕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를 조롱하는
자들이 ‘당신이 메시아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스스로 자기를 구원해 보
라’(29-32절)며 비아냥거렸다. 그가 당할 수 있는 극도의 고난을 인간들로
부터 당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께서 왜 그런 고난을 당해야 했던가 하는 점을 깨달
아야 한다. 주님께서 “내가 목마르다”고 하신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구속
사적 고통과 비움의 의미가 실현되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6 “다 이루었다”(요 19:30) - 주님의 구원 사역의 완성을 기억함
주님께서는 고통 가운데서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고 말씀하셨다.
이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뜻이 완성되었음을 만방에 선포하는 의미를 담
고 있다. 인간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천상의 왕이 그것
을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하나님께서 이룩하신 사역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한 천국을 회복하시기 위해 하시고자 한 일을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하나
도 남김없이 다 이루셨다. 이는 창조 이전의 하나님의 작정과 사탄에 의한
인간의 타락과 직접 연관되는 의미이다. 주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교제가 회복되었
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창세 전에 작정된
하나님의 경륜과 그 후 인간들의 죄악 문제를 다 해결하셨음을 선포하셨다.
그것은 지상 사역의 성취와 영원한 구속 사역의 승리를 선포하는 의미를 지
닌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좁은 의미에
서는 그 말씀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 가운데 “하늘에서 이루
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말과 연관된다.

7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 영원한 하
나님의 영광을 기억함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을 볼 수 있다.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
고 강림하신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십자가 사역을 완성하심으로써 입으셨던
인간의 몸의 기능을 완수하신 것이다. 그 말씀 가운데는 단순히 성자 하나님
께서 자신의 영혼을 성부 하나님께 부탁한다는 요청 이상의 놀라운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성자께서 자신의 십자가 사역을 완성하심으로써 성부와 완벽
한 영화로운 교제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삼위일체의 한 위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
상에 강림하셨다. 그것은 죄에 빠진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마
1:21). 하나님께서 인간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실 자체가 엄청난 고난
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었다. 하
나님께서는 죄에 빠진 인간들이 가지는 그 고통을 감내하시면서 영원한 경륜
을 이루어 가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의 시간별 상세 행적

2009/04/09 - [믿음, 신앙, 교회] - 예수님의 부활 - 그 일주일간의 행적
2009/04/09 - [믿음, 신앙, 교회] - 예수님의 부활 - 십자가 이전 시간별 사건
2009/04/09 - [믿음, 신앙, 교회] - 예수님의 부활 - 십자가상의 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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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묵상하기 위한 그 앞뒤 행적과 사건들
의 배열이다. 시간 계산은 대략적인 추정이다.

1. 최후의 만찬
▲ 목 오후 5시 - 6시
▲ 목 저녁 6시 - 7시 / 어머니와 헤어져 최후 만찬의 다락방으로 가심
▲ 목 저녁 7시 - 8시 / 모세의 율법에 따른 만찬
▲ 목 저녁 8시 - 9시 / 유월절 만찬 후 사도들의 발을 씻어 주심. 성만찬
을 제정하심. 최후의 만찬 후 겟세마네 동산으로 향하심.
2. 겟세마네의 고뇌 - 세 시간
▲ 목 밤 9시 - 10시 / 겟세마네의 고뇌 첫째 시간
▲ 목 밤 10시 - 11시 / 겟세마네의 고뇌 둘째 시간
▲ 목 밤 11시 - 12시 / 겟세마네의 고뇌 셋째 시간
▲ 목 밤 12시 - 1시 / 체포되심
3. 고난 당하심
▲ 금 오전 1시 - 2시
▲ 금 오전 2시 - 3시 / 안나스 앞에 끌려가심
▲ 금 오전 3시 - 4시 / 가야바 앞에 끌려가심, 베드로의 부인
▲ 금 오전 4시 - 5시 / 병사들 가운데 계심
▲ 금 오전 5시 - 6시 / 감옥에 갇히심
▲ 금 오전 6시 - 7시 / 가야바 앞에 다시 끌려가셨다가 빌라도에게 압송되

▲ 금 오전 7시 - 8시 / 빌라도 앞에 끌려가시고 이어서 헤롯에게 넘겨지심
▲ 금 오전 8시 - 9시 / 다시 빌라도 앞에 서심, 예수님을 두고 바라바를 택
한 유다인들, 매를 맞으심
▲ 금 오전 9시 - 10시 / 가시관을 쓰심, 사형 선고를 받으심
▲ 금 오전 10시 - 11시 /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시어 거기에서 옷 벗
김을 당하심
▲ 금 오전 11시 - 12시 / 십자가에 못박히심
4. 십자가의 고뇌 - 세 시간
▲ 금 낮 12시 - 1시 / 십자가의 고뇌 첫째 시간
▲ 금 오후 1시 - 2시 / 십자가의 고뇌 둘째 시간
▲ 금 오후 2시 - 3시 / 십자가의 고뇌 셋째 시간
▲ 금 오후 3시 - 4시 / 돌아가신 후 창에 찔리고 십자가에서 내려 지심
▲ 금 오후 4시 - 5시 / 무덤에 묻히심

우리 교회에 오는 교계 신문에 정말 좋은 기사가 있네요.
평생 교회 다니면서도 정확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일이라 블로그에 기록해 놓습니다.

출처 :기독교 개혁신보
 http://www.rpress.or.kr/planning_special/xinu_view.php3?SN=673&CP=0

2009/04/09 - [믿음, 신앙, 교회] - 예수님의 부활 - 그 일주일간의 행적
2009/04/09 - [믿음, 신앙, 교회] - 예수님의 부활 - 십자가 이전 시간별 사건
2009/04/09 - [믿음, 신앙, 교회] - 예수님의 부활 - 십자가상의 칠언

고난주간 동안 예수님의 행적

<일요일>
▲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마 21:1-17; 막 11:1-11; 눅
19:29-44)
<월요일>
▲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다(마 21:18-19; 막 11:12-14)
▲ 성전을 정화하시다(마 21:12-13; 막 11:15-18; 눅 19:45-46)
<화요일>
▲ 성전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심사하다(마 21:23-22:14; 막 11:27-
12:12; 눅 20:1-19)
▲ 성전에서 가르치시다(마 22:41-46; 막 12:35-37; 눅 20:41-44)
▲ 마리아가 예수에게 향유를 붓다(마 26:6-13; 막 14:3-9; 요 12:2-8)
<수요일>
▲ 예수를 잡을 음모를 꾸미다(마 26:14-16; 막 14:10-11; 눅 22:3-6)
<목요일>
▲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갖으시다(마 26:17-25; 막 14:12-21; 눅 22:7-
30; 요13:1-30)
▲ 제자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하시다(요 14-16장)
▲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마 26:30-46; 막 14:26-42; 눅 22:39-46;
요18:1)
<금요일>
▲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받으시다(마 26:47-27:1; 막 14:43-15:1; 눅
22:47-71; 요 18:2-27)
▲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으시다(마 27:2-26; 막 15:1-15; 눅 23:1-25;
요 18:28-19:16)
▲ 십자가형을 받으시다(마 27:31-56; 막 15:20-46; 눅 23:26-49; 요 19:16-
30)
<금-주일>
▲ 무덤에 묻히시다(마 27:57-66; 막 15:42-47; 눅 23:50-56; 요 19:31-42)
<주일새벽> ▲ 부활하시다



CBS 기자분의 컬럼인데,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군요.

한국교회 해외선교, 이제는 바꿔야합니다 l 취재파일 2007-09-19 오전 10:11:02


해마다 9월이면 주요 장로교단들이 총회를 엽니다. 해방전 조선예수교장로회가 9월에 총회를 연 것에서 유래된 일인데, 교단은 수십개로 분열됐지만 총회만은 전통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 교단 총회에 내빈으로 참석한 세계교회 대표들이 덕담만 하던 예전과 달리 이번에는 한국교회의 해외선교에 따끔한 충고를 쏟아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피랍사건을 목격한 이들 해외교회 지도자들은 한국교회가 현지문화를 존중하는 성숙한 선교전략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우선 독일서남부지역교회연합회 EMS는 해방후 한국교회와 교육계, 방송계의 발전을 위해 막대한 지원과 협력을 해온 단쳅니다. 한국에 애정이 많다고 할 수 있죠. 한국을 방문한 버나드 딘클러커 EMS 총무는 EMS도 해외에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지만 현지인을 존중하고 현지실정에 적합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다면서
무슬림지역에서의 선교는 단기적으로 쉽게 성과를 얻으려하기보다 남의 종교도 존중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현지인들을 감동시켜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수십년간 내전중인 레바논에서 EMS가 운영중인 학교가 이슬람군에게 한번도 공격을 받지않은 것은 이같은 선교원칙덕분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세계개혁교회연맹 총무인 세트리 니오미 박사는 선교사파송 2위 국가인 한국교회는 이제 현지인들과 파트너쉽을 강화하는 새로운 선교전략을 모색해야한다고 충고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피랍사건은 끝났지만 기존 선교전략을 수정하지 않을 경우 큰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우려를 거듭 나타냈습니다.

프라와트 키드완 아시아기독교협의회 총무는 한국교회의 선교활동에 대한 아시아교회들의 불만을 생생하게 전달했습니다.
물량공세로 현지교회를 분열시키고 당장의 실적 올리기에 급급해 장기적인 선교효과에는 부정적 결과를 낳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선교사들의 열성적 활동이 존경이 대상이 아니라 감시의 대상이 됐다는 키드완 총무의 지적은 정말 듣기에 민망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선교대상국가에 대한 일방적 선교가 아니라 현지인과 함께하는 해외선교가 되기위한 노력이 국내 기독교계에 전무한 것은 아닙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가 해외 선교지에 파송한 선교사를 부르는 명칭은 다른 교단이나 선교단체와 다릅니다. 기장총회는 선교사라는 말 대신 선교동역자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지인을 정복적인 선교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현지인에 의해 스스로 선교가 이뤄질 수 있도록 현지인을 세우고 도와야한다는 선교신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인간이 선교의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교의 주체라는 ‘하나님의 선교’신학에 따른 것입니다.

기장총회는 이에 따라 노골적으로 개종을 강요하기보다는 현지인들의 문화와 시대상황을 존중하면서 우선 기독교에 대한 호감을 확산시키는 선교전략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또 비록 연약할지라도 현지교회를 무시하지 않고 현지교회가 스스로 선교할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하는 정책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한편 국내에 들어와있는 외국인노동자 선교도 현지인을 통한 선교의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대다수가 이슬람과 힌두권 국가 혹은 사회주의권 출신이기때문입니다.

박천응 목사(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 소장)는 “이주민 백만시대가 되었다. 한국교회가 이들에게 마음을 열고 문을 열어야 한다”면서 이들이 기독교인이 되거나 최소한 기독교에 호감을 갖고 고국으로 돌아갔을 때 현지에서의 선교활동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 현지 선교사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라고 전합니다.

한국교회의 해외선교, 이제는 내가 해야한다, 혹은 빨리 실적을 내야한다는 조급증에서 벗어나 현지인들의 마음을 얻는 노력이 우선돼야할 것입니다.

이번 추석연휴, 모처럼 온 식구가 둘어앉은 가정의 대화 가운데 대선과 신정아씨 등이 소재가 되어 이야기꽃을 피우겠지만 성도들의 가정에서는 한국교회의 앞날에 대해, 특히 해외선교의 방향에 대해서도 한번쯤 시간을 할애하셨으면 합니다.



CBS 종교부 권혁률 기자 hrkwon@cbs.co.kr

온 나라가 시끌시끌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보게 됩니다.

어제 다른 인터넷 동호회에서 번개하면서 잠깐 나온 얘기가 계속 머리속을 도는군요.

하나님의 섭리가 놀랍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교회 동호회가 아니었구요.

'동종섭식' 이라는 비 윤리적이고, 비성경적이고, 인위적인 인간의 창조섭리를 무너뜨리는 행위들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

동물성 사료를 먹고, 동종섭식을 하는 경우 동물들이 더 잘자라고 육질이 좋다는 눈에 보이는 큰 장점을 얻으면서

너무나도 무서운 질병 하나를 얻은 셈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런 경우는 이전의 AIDS의 경우도 마찬가지..

다른 유통 경로가 있을 수 있겠으나, 동성간의 성행위를 통한 인간의 쾌락 추구가 결국은 AIDS라는 무서운 질병의 가장 큰 원인 된것처럼.

결국 마지막 날에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은 인간 스스로가 가져온 욕망의 결과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덤으로 모든 사람들이 좋은것, 맛있는것, 즐거운 것을 찾을 때, 불편한것, 힘든것을 계속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정말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근래에 교회 담임목사님께서 편하고, 즐겁게, 부유하게 사는 것이 믿는 자의 삶이 아니라는 말씀을

몇번의 설교를 통해 하셨는데, 절대 공감하게 됩니다.


2004년 12월 24일 우리 가족은 은평교회에 등록했다.
98년 1월 등록해서 7년을 다닌 교회를 떠나야만 하는 아픔을 안고 몇달을 돌아다니다가 선택한 결론이었다.

장상래 담임목사님의 너무나도 좋은 말씀은 그동안 설교때문에 힘들어 하던 나와 우리 가족에겐 너무나도 단비같은 말씀이셨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그저 예배에만 집중 할 수 있는 시간들은 너무나 기쁨이 넘치는 예배의 회복이었다.

이전 교회에서 주일 아침이면 나가서 성가대로 또 잠깐은 교사로도 저녁 예배엔 찬양리더로 정신없이 보내야 했던 시간들..하긴 이런 생활은 이전 교회뿐 아니고 군 입대 후 계속 되는 교회 생활이었던 것 같다. 예배로 드려지기 보다는 예배를 준비하는 일에 더 애 쓰고 교회의 많은 일들에 참여하느라 바삐 보내야했던 시간들..이러한 생활때문에 오히려 삼교대 해야하는 아내의 신앙생활에 도움은 커녕 사회보다 더 내조가 필요했던 시간들이었기에 서로의 신앙은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던 것은 자명한 결과였고..ㅠ.ㅠ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 가정을 불쌍히 보시고 나락으로 떨어지기 직전에서 건지시고 새 터전을 마련해주신것일지도 모른다.

은평교회에서의 처음 몇달은 그러한 피폐해진 우리 부부의 신앙을 회복시키시고 예배로 나아가게 하시는 기쁨을 풍성히 누리게 하셨고, 특별히 자녀들에게도 예배와 말씀을 배우게 하시는 은혜를 누리게 하셨다. 전에 작은 교회의 한계때문에 제대로된 아이들 예배를 기대하기 어려웠던 환경에서 은평교회의 교육부는 아이들에게도 큰 기쁨이었다. 2살짜리 딸아이는 영아부에서, 6살짜리 아들녀석은 유치부에서 또래아이들과 예배드리고, 찬양드리는 훈련을 받게 되었다.

예배드리기 30분전에 나와 아이들을 각자 부서 성가대로 보내고 본당에 가서 앉아 예배드리는 그 시간들은 내가 철 든 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하나님과의 귀한 만남의 시간이었다. 매주 드리는 예배 시간마다 눈물이 줄줄 흐르는 그 감격은 우리 가정을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에 대한 감사가 절로 나는 것이다. 그렇게 예배를 시작하고, 회중석에서 드리는 예배는 찬양이든 기도든  말씀이든 어떠한 것도 소소하지 않게 나에게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하긴 회중석에서 드리는 예배가 몇년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으니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 교회 건축 조감도 사진. 지금은 완공되어서 이쁜 예배당에서 예배드리고 있다.


은평교회에서는 우리 가정을 이쁘게 봐주셔서 등록하고 한달만에 담임목사님께서 대심방을 해주셨다. 주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그곳이 가나안"이라는 말씀이셨다.
그리고는 바로 다음분기부터는 헌금위원으로 세워주시고, 한분기 동안 봉사하는 기간을 채 채우기 전에 성가대원으로 다시 세워주셨다.
성가대원 서고 이주 있다가 솔로 했던가?
여튼 교회에서 이쁘게 봐 주신 덕분에 잘 적응하고 - 개인적으로 교회에 잘 적응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함 - 신앙생활 잘 할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그게 벌써 4년전 이야기.
여튼 은평교회 출석한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쁨인지 모른다.

우리 교회 찾아오는길~~~

홈피 : www.epch.org
주소 : 서울시 강동구 길2동 252번지
전번 : 02-482-0626
약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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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종로3가, 군자에서 5호선 상일동행 탑승 → 길동역 하차 2번 출구 길동초등학교, 길동시장 방향
경부고속도로 → 서울톨게이트 → 외곽순환도로 구리방면 → 하남, 천호대교방면 → 천호대교 방향으로 직진하다 진흥아파트 사거리 은평교회
중부고속도로 → 동서울 톨게이트 → 하남, 천호대교방면 → 천호대교 방향으로 직진하다 진흥아파트 사거리 은평교회
(길동 진흥아파트 하차)
9301, 112-1, 112-5, 30-2, 88, 112, 341, 30-3, 300, 3412, 370, 9301, 300, 112, 112-1, 30-2, 88, 3412, 370 (진흥아파트 하차)

이번 아프간에서의 납치 사건으로 곱지않은 개신교를 향한 시선에 뭐라 대답할 거리가 없었다.

알고보면 선교라는 것이 교회라는 물리적인 공간내에서만의 개념이었고, 선교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없었기때문이었으리라..

그러던중 뉴스앤조이에 올라온 현지 선교사님의 이메일 기사는 내가 밝은 빛을 주었다.

궁극적으로 한국교회, 선교의 잘못된 방향에 대한 하나님의 질타는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희생으로 23인의 목숨을 가져가신다면 너무나 큰 죄값을 치루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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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글은 그 기사의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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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된 23명의 무사귀환을 간절히 염원하는 가운데, 한국교회의 선교 방식에 대한 비난 여론 또한 인터넷에 봇물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에 <뉴스앤조이>에서는 아프간 피랍 사태를 통해 분쟁 지역에서의 인도적 봉사와 선교 방식에 관한 논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글은 아프가니스탄 현지에서 긴급 구호와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한 선교사가 이메일로 <뉴스앤조이>에 보낸 것입니다.  <편집자 주>

2007년 7월 20일 아침 6시,  어디선가 핸드폰 진동소리가 들렸다. 몸살과 오한으로 밤새 잠을 설치다 어렴풋이 든 잠이어서 금방 받지 않다가 전화를 받았는데, 받자마자 끊어졌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대사관 강 모 영사의 전화였다. 이른 아침에 대사관으로부터 전화라, 심상치 않은 듯하여 곧 전화를 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이른 아침에 전화 드려 죄송합니다. 한국인들이 피랍되었다는 정보가 있어서 확인 차 전화 드렸습니다. 단기 방문객들 가운데 그런 팀이 있나요?"

"어제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곧 전 지역에 확인해 보고 전화 드리겠습니다."

강 영사와 통화를 마치자 혹 싶어서 칸다하르로 전화를 했다. 평소에 일찍 일어나시는 지부장이 이날따라 잠에 덜 깨신 듯 피곤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셨다.

"이러이러한 사정으로 문의를 드렸는데, 혹 그런 팀이 있나요?"

"어제 한 팀이 오도록 되어 있었는데, 밤새도록 기다렸지만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고 있는 분당샘물교회 단기팀이 바로 그들이었던 것이다. 이 문제는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 진행 중이다, 그러나 해결이 된다 해도 그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 후폭풍을 예상하고 준비해야 할 복잡한 문제다.

아프간이 가장 큰 피해자…한국선교 위기관리 능력 떨어져

이번 일로 우선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 사건으로 인한 최대의 피해자는 아프간스탄이라는 것이다. 어떤 형태의 결과가 나오든 결국 그 내용은 부메랑이 되어 아프가니스탄에 피해를 입힐 것이다. 아프간은 여전히 위험하고 불량 국가라고 전 세계가 한번 더 확인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둘째는 한국선교의 위기라는 것이다. 고 김선일 선교사의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국교회의 위기관리 능력은 제로 수준에 가깝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이해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능력이 아직은 미숙하다. 이번 사태로 인해 선교의 문이 닫힐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단순논리만 붙잡고 무분별하게 뛰어들 세력이 많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나 복잡한 사건이기에 어디서부터 생각을 하고 정리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인간적인 솔직한 심정은 당장 우리 가족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이들 학교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혹 살게 되더라도 더 이상 아무 방문객도 올 수 없는 곳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이런 고민으로 가득 차 있다.

입국이 금지된 상태에서 언론사들은 연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화를 해온다. 기독교방송사들도 “선교사님, 선교사님” 하면서 연일 현지상황에 한마디라도 듣고자 목을 맨다. 내가 선교사인지 특파원인지 착각이 든다. 어쩌면 이 기회에 생방송 9뉴스에 이름 석 자라도 올리고 싶은 숨은 공명심 때문일까? 기자도 아니면서 괜히 목에 힘주고 이런저런 개인 평까지 섞어가면서 기자들의 질문에 장단을 맞추어본다.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무분별한 한국선교 전략에 대한 경고인가? 아니면 한국교회 전체에 대한 경고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이유의 희생양인가? 작년에 연이은 비기독교인들의 엄청난 비난을 단지 기독교 신앙을 모르는 이들의 편견이라고만 치부하기엔,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도 선교의 길은 계속 가야 한다는 헌신만을 다짐하기엔, 지금 우리 앞에 놓여진 문제가 단순논리로 해석되기 힘든 부분이 많다.

지난 6년 동안 수많은 단기팀들이 이곳을 지나갔다. 이번 팀보다 더 많은 인원의 단기팀들도 수없이 스쳐갔다. 그리고 이번 팀이 현지 문화에 돌출되는 행동으로 주목받을 짓을 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더욱이 현지 사정에 밝은 3명의 한국인 선교사의 인솔 하에 이동을 하지 않았던가? 다만 카불-칸다하르 길은 아침에 출발해야 한다는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은 부분은 아쉬움으로 진하게 남는다.

그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은 여러 단기팀 중에 유독 이 팀이 희생양이 되어 시대의 집중을 받고 있는 것은 이 팀이 지녀야 할 십자가일 수밖에 없다. 주님은 그런 아픔을 이 팀에게 허락한 것이다. 무엇이 이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고난의 십자가를 지게 한 것인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었던 문제였고 그것이 어쩌다 보니 샘물팀이라 한다면, 이곳의 선교사들은 그동안 안전 불감증 속에 단기팀들을 맞이했다는 것인가? 

그러나 이 팀만을 희생양으로 삼기에는 앞으로 이 팀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지고 가야 할 짐이 너무나 크게 보인다. 누군가는 같이 져주어야 하고 그 누군가에 한국교회 전체가 동참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작금의 한국교회는 그런 준비가 안 된 듯하여 더 걱정이 앞선다. 

둘째 녀석을 집으로 데려다 주고 늦은 시간이지만 한국인 인질들의 협상 마감 시한이 다가오면서 찹찹한 심정으로 인터넷이 설치되어 있는 사무실로 다시 가서 계속 생각했다. 도무지 편한 마음으로 집에서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 성경은 믿음을 요구하는데 믿음이 자꾸 없어진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울분을 터뜨리기 전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이 안 되는 나의 미천한 영성이 안타깝다. 

같은 시간 서구 선교사들은 동방에서 온 믿음의 동료들을 위해 특별 저녁기도회로 모이고 있다. 특별한 관계도 없는 23명의 영혼들을 위해 사건 직후부터 24시간 기도 체인을 만들어 자원하며 기도해주는 그분들에게 그저 고마울 뿐이다. 글을 쓰고 있는 이 늦은 시간에도 누군가는 골방에서 기도의 합주를 아버지께 올려드리고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큰소리 내어 섬긴다

과연 한국선교사들 가운데는 그만한 영적 책임감을 가지고 선교지를 바라보고 있을까? 과연 한국교회 가운데는 그만한 영적 성숙함을 가지고 선교에 임하고 있을까? 그런 책임감과 성숙함보다는 열심과 비전에만 집중하고 있지 않았는가? 

120여 년 전 꽁꽁 마음 문이 닫혔던 조선 민족을 섬기기 위해 청춘의 몸으로 왔던 벽안의 선교사들. 때로는 배우자를 잃고, 자식을 잃고, 부모를 조선 땅에 묻으면서도 그저 말없이 수고하고 눈물 훔치던 그들의 수고가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앞 다투어 자랑하는 제2의 선교 파송대국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빛도 소리도 없이 섬긴 방면에 지금의 우리는 너무나 소리를 내어 섬기고 있다. 자신의 비전과 욕망조차도 주님의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이루어 달라고 떼를 쓴다.

작년 이맘 즈음 2000명의 인원으로 평화 행진을 하려고 했던 분들에게 묻고 싶다. “안전 문제에 대해 전혀 문제가 없음을 장담하셨는데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왜 그들은 가만히 있는 것일까? 최소한의 양심과 양식이 남아있기에 미안함으로 침묵을 지키는 것일까? 행사에 반대하던 아프간 선교사들을 겁쟁이라고 비난했던 단체 대표께서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당신이 대표로 있는 단체의 선교사들이, 그 단기팀 운영의 전략적인 선교사들이 인솔을 하다가 벌어진 이번 사태에 대해 최소한의 양식이 남아있다면 선교계에 한마디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습니다”라고… .

그럴 용기가 없다면 타선교 단체장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인들이 오늘 석방된다고 하는데 알고 계세요?”라는 너무나도 무책임한 발언만큼은 안 해주셨으면 한다. 

지금은 떠나있지만 10년을 넘게 몸담았던 단체이기에, 이생을 다할 때까지 지울 수 없는 마음 한편의 그리움과 애틋함이 배어있기에 호소한다. 그리고 조국 교회여, 조용히 아버지 앞에 침묵함으로 나아가자. 입을 벌려 악을 쓰지 말고 아버지의 마음을 느껴보자. 안 느껴지면 안 느껴지는 그것을 붙잡고 애통해 하자. 그래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회복하자. 우리의 속사람을, 한국교회의 내부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가득 가득 채우자. 그것이 지금 당장 모든 기독교인들이 취해 야 할 최우선적이며 최종적인 아버지의 마음인 것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협상 시간이 하루 더 연장이 되었다는 속보가 나왔다. 하루 더 공포 속에서 지낼 팀들이 생각난다. 잘 알고 지내던 자매의 얼굴이 스쳐간다. 우리 아이들이 무척이나 따랐던 자매다. 보통 사람들은 견디기 힘든 성장기를 겪으며 자라왔기에 지금의 고난도 잘 참으리라 애써 위안해본다. 어쩌면 협상이 며칠 더 길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작은 딸이 내 앞에서 자고 있다.

사랑하는 딸들아!

너 희들을 데리고 우즈베키스탄을 떠나 매서운 겨울강 바람을 건너 오직 믿음으로 아프간에 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이곳을 떠나야만 할 것 같다. 잠들기 전에 너희가 했던 말이 아직 귓전에 남아 있다. “아빠, 우리 정말 떠나야 해요?” 아직은 무엇이라 분명히 말하기 힘들고 그러나 곧 분명히 말할 시간이 오겠지만 아빠는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시로 답을 대신한다.

언더우드의  ‘보이지 않는 조선의 마음’의 일부 중에서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주소서!

프런티어의 긴장이 진하게 감도는 아프카니스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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