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노제를 마치고 밤 늦게 돌아 온 저는 곧바로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온몸이 쑤시고, 열이 나고, 목도 부었더군요. 아침 먹고 잠 들었다가, 점심 먹을 때 일어났다가 다시 스르르 잠이 들었고, 저녁을 먹고 나서야 간신히 몸을 추스릴 수 있었습니다.

아직 몸도 무겁고 슬픔도 가시지 않았지만 노제 총감독으로서의 소회를 빨리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이 글을 씁니다.


노제의 막을 열기까지

지난 일요일, 영결식과 노제의 총감독 제의을 받은 저는 기획과 연출 분야에서 저와 호흡이 잘 맞는 후배들에게 소식을 알렸습니다. 후배들은 만사를 제쳐 놓고 참여할 의사가 있음을 알려왔습니다.

노제(路祭)란?

운구행렬이 지나는 길에 돌아가신 분의 친지나 특별한 인연이 있는 장소를 지날 때, 잠시 멈추고 지내는 제사.


월요일에는 하루종일 봉하마을 장례준비위원회 측과 긴밀하게 상의했습니다. 영결식은 전체 컨셉과 프로그램에 대해 제가 점검만 하고 모든 준비는 행정안전부의 국가의전팀에서 공식적으로 진행하며, 노제는 전적으로 제가 책임을 지고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몇몇 후배들과 노제의 기본적인 구성안을 만든 저는 화요일 오전에 기획연출팀을 소집했습니다. 이희진(기획), 유기형(연출) 김태균(구성작가), 김은영(기획부), 김수진(연출부), 송태성(기획부), 조영호, 조승호(영상), 배정혜(안무) 등 역전의 용사들이 속속 모여 들어 즉시 준비에 돌입했습니다.

저는 영결식과 노제 전체의 컨셉을 "사람 사는 세상-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로 잡고 구성안을 수정해가고 출연진을 확정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주제를 그렇게 잡은 이유에 대해서는 제 블로그의 <의혹의 죽음, 그래도 여전히 화두는 "사람!">이라는 글에서 설명했습니다.

그 분은 언제나 "사람 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몸을 바쳤고, 싸웠고, 분노했고, 도전하며 살아오셨습니다. '
사람'에 대한 사랑과 비전이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비판과 비난과 조롱과 저주에도 꿋꿋이 버터 오셨습니다. '
사람'에 대한 겸손한 존중심과 높은 윤리관과 엄격한 도덕율이 있었기에, 그 드높은 이상에 상처를 입힌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부엉이바위 아래 몸을 던지신 겁니다.

김제동(1부 사회), 안치환, 양희은, 윤도현, 우리나라, 도종환(2부 사회), 안진경(추모시), 김진경(추모시), 안숙선(추모창), 장시아(유서낭송) 등 모든 분들이 두말없이 출연을 승락하고, 협조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수요일쯤 돌발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국립무용단(진혼무), 국립창극단(혼맞이 노래), 국립국악관현악단(추모 연주)의 출연에 제동이 걸린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행정안전부로부터의 협조 공문이 문화부로 안왔다는 것이었지만, 제가 파악한 상황은 정부가 국가가의전으로서의 영결식은 어쩔 수 없이 치르지만, "노제"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협조만을 하려는 방침에 따라 국립예술단체가 노제에 참가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전에 민주열사들의 노제가 거대한 시위로 변화되는 체험을 여러 번 한 터라 그에 대해 거부감과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왔습니다. 그들은 국립단체가 끼어들지 않고 민간 무용가나 연주단으로 간단한 노제가 치러지는 걸 원하는 눈치였지만, 저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각오로 얼마 전까지 저와 손발을 맞추며 일을 했던 문화부와 국립극장를 강하게 압박했습니다.

저는 국립극장장을 해봤기 때문에 최소한의 짧은 시간 안에 행사를 빛나게 해 줄 각 단체들의 역량을 잘 알고 있었고, 전적으로 저를 믿고 출연해 줄 단원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같이 화를 내며 이틀간의 실랑이를 벌인 끝에 국립무용단과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출연은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국립창극단만 단체 사정 상 11명의 단원을 다 파견할 수 없고, 5명밖에 파견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문화부도 더 이상 협조를 안하려 한다는 입장을 확인한 저는 기획진에게 국립예술단체 노조위원장의 입장을 들어보라고 했습니다. 윤석안 노조위원장은 오히려 비협조적인 극장의 처사에 화를 내며 극장장과 예술감독에게 항의를 하는 등 해결사로 나섰습니다. 결국 목요일 자정이 되어서야 모든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노제 1부의 막이 열리다.

드디어 5월 29일 오전 7시, 저는 시청광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7시에 경찰차량을 철수시키기로 약속한 경찰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었습니다.

 
한동안의 실랭이 끝에 7시 40분쯤 경찰차가 철수했습니다. 저희들은 밀려드는 인파와 수시로 발생하는 현장의 문제들을 점검하면서 10시 50분까지 리허설을 진행했습니다.


11시부터 영결식을 생중계로 방송한 뒤, 경복궁을 출발한 운구행렬이 도착하는 동안 1부 추모 공연 김제동씨의 사회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작곡가 윤민석씨가 추모 노래로 작곡한 <바보연가>를 노래패 '우리나라'가 부른 다음, 안치환씨가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마른 잎 다시 살아나> 등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가 울려 퍼지자 많은 시민들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고, 어떤 이들은 노란 색 풍선을 하늘 높이 띄워 날리기도 했습니다.


이어 양희은씨가 <상록수>를 불렀습니다. 그 노래는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노 전 대통령이 직접 기타를 치며 불러 화제를 모았던 곡이기도 합니다.


김제동씨는 “여러분의 눈빛과 풍선이 언제나 푸른 상록수와 같은 역사가 되어 아이들에 비춰지길 바란다”고 염원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이어 YB(윤도현, 허준, 김진원, 박태희)는 <후회없어>와 <너를 보내고>를 불렀습니다. 윤도현은 “그분과 함께 한 곳은 바로 ‘사람사는 세상’이었습니다. 비록 그분의 몸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분이 남긴 뜻은 가슴 깊이 담겠습니다”며 노래를 열창했습니다.

노래패 ‘우리나라’의 <다시 광화문에서>도 울려 퍼졌습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우리 다시 만나요 다시 한번 오늘의 함성 그대로 간직해요."란 가사를 담은 노래는 전 국민을 하나로 묶은 이곳을 추억하자는 의미를 담아 더욱 애절하게 들렸습니다.

김재동씨는 1부의 마지막을 유서의 내용을 나름대로 재해석한 아름다운 말로 장식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이 당신에게 진 신세가 너무도 큽니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그 분에게 받은 사랑이 너무나 큽니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그 분으로 인해 받은 행복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짐 우리가 오늘부터 나눠지겠다고 다짐합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저희가 슬퍼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슴 속, 심장 속에 한조각 퍼즐처럼 영원히 간직하겠습니다.
미안해 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이야 말로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운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님의 뜻을 저희들이 운명처럼 받아들고 가겠습니다.
화장하라고 하셨습니다. 님을 뜨거운 불구덩이에서 태우는 것이 아니라, 저희들의 마음 속의 뜨거운 열정으로 우리 가슴 속의 열정으로 남기겠습니다.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기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 가슴 속에도 조그만 비석 하나씩 세우겠습니다.




노제 2부의 막이 열리다.


마침내 1시20분쯤 노무현 전대통령의 운구행렬이 노제가 열리는 서울광장 안으로 들어서자,
광장은 이내 눈물바다로 변했습니다. 어떤 이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기도 했으며, 어떤 이는 아예 목 놓아 울기도 했고, 하늘을 우러르며 소리없이 우는 이도 있었습니다.
 


도종환 시인의 소개로 무대에 오른 저는 "지금 이 자리는 노무현 전대통령과 모든 국민들이 영원한 인연을 맺는 자리로서 뜨거운 가슴으로 고인의 넋을 맞이하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국민들과 함께 하는 국민장,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 노제를 시작하겠습니다!" 라는 말로 개식선언을 한 뒤, 크레인에 올라 타고서 "해동조선 대한민국 제 16대 노무현 대통령 복~복~복~"을 외치는 초혼 의식으로 노제의 시작을 열었습니다.

초혼(招魂)이란? 

사람이 돌아가시면 고인이 살았던 집의 지붕 위에 올라가 고인이 평소에 입었던 옷을 흔들며 하늘을 향해 고인의 넋을 알리는 의식.



이어서 향로를 맨 국립창극단의 <혼맞이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어너 어허어 넘차 어이가리 넘차 너화넘
북망산천이 머다더니 저 건너 봉화산이 북망이로구나
어너 어허어 넘차 어이가리 넘차 너화넘



비통하고 애절한 소리에 맞춰 국립무용단과 대전의 놀이패 우금치 단원들이 운구차를 한바퀴 돈 뒤 무대 위로 올라 가 진혼의식을 시작했습니다. 


죽은 자와 그를 사랑했던 여인의 비통한 슬픔을 주제로 구성된 <진혼무>가 추어지는 동안 안도현 시인의 추모시가 낭송되었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란 제목의 추모시를 통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절절한 추모의 뜻을 담아냈습니다.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
고마워요, 노무현 
아무런 호칭 없이 노무현이라고 불러도
우리가 바보라고 불러도 기꺼이 바보가 되어줘서 고마워요
아, 그러다가 거꾸로 달리는 미친 민주주의 기관차에서
당신은 뛰어내렸어요, 뛰어내려 으깨진 붉은 꽃잎이 되었어요
꽃잎을 두 손으로 받아주지 못해 미안해요
꽃잎을 두 팔뚝으로 받쳐주지 못해 미안해요
꽃잎을 두 가슴으로 안아주지 못해 미안해요
저 하이에나들이 밤낮으로 물어뜯은 게
한 장의 꽃잎이었다니요!···당신이 일어나야 한반도가 일어나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아아, 노무현 당신!




이어서 김진경 시인은 <노무현 살아오소서>라는 추모시에서 “바보 노무현, 그 작고 아름다운 상식이 꽃피는 나라로 살아오소서, 우리가 반드시 이룰터이니 그 아름다운 나라로 다시 오소서”라고 슬픔을 토로했습니다.

노무현 살아오소서

....아, 외로운 노무현

그 작고 아름다운 상식을 위한 싸움이야말로
가장 외롭고 힘든 싸움이라고
그 토닥이는 손길로 우리 다독이며 다시 살아오소서....



진혼무가 끝나고 안숙선 명창의 추모창이 이어졌습니다. 임방울 명창이 사랑했던 여인의 죽음을 애도하여 창작한 <추억>이란 노래입니다. 가슴을 후벼 파는 진양조의 비통하고 애절한 가락이 서울 광장을 울렸습니다.

추억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한데
님은 어디로 행하시는가
황천이 어디라고 그리 쉽게 가려던가
그리 쉽게 가려거든 당초에 오지나 말 것을
왔다 가면 그냥 가지
모든 터에다 당신 이름을 두고 가면서
모두에게 슬픔만 남기고 가네.....



이어 도종환 시인이 “고인의 조각난 육신으로 정의로운 것들이 하나가 되고 뉘우치고 용서하고 화합해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소망한다”는 멘트와 함께 추도 묵념을 이끌었습니다.


묵념이 끝난 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유서를 쪽방촌 출신의 사회복지사이며 시인인 정시아 님이 낭독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화장해라···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유서 낭독과 함께 대형 화면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전 영상이 펼쳐졌고, 시민들은 또 다시 눈물지었습니다.


노제의 절정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전에 즐겨 불렀던 <사랑으로>가 영상화면에서 육성으로 울려퍼진 순간이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동안에 할 일이 또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란 가사가 흘러나오자 광장은 온통 눈물 바다를 이뤘습니다.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합창을 했습니다.



권양숙 여사와 아들 노건호 씨, 딸 노정연 씨도 눈믈을 쏟아냈으며, 시민들은 잔디밭에 주저앉아 목 놓아 통곡하기도 했습니다.

합창을 끝낸 시민들은 한 목소리로 “노무현 대통령 당신을 사랑합니다”고 외쳤습니다.
노제가 끝난 뒤 대다수의 시민들은 안치환씨와 우리나라와 함께 <상록수>, <아침이슬>,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의 노래를 부르며 운구행렬을 따라 서울역으로 걸었습니다.
 



노제를 끝내고

나중에 기사를 보니 노제가 진행되는 동안 하늘에 채운이 떴다더군요.

채운(彩雲)이란?
 
여러 빛깔로 아롱진 고운 구름. 구름을 이루는 물방울이나 얼음 결정에 빛이 회절되어 고운 빛깔로 물들어 보인다.
채운은 아름답기 때문에 서운(瑞雲), 경운(景雲), 자운(紫雲) 이라고도 하며, 큰 경사가 있을 징조라고 알려져 왔다. 




저는 보지 못했지만 정말 평생에 몇 번 보기 힘들다는 오색 채운이 어렸다면, 아마도 하늘에 우리의 정성과 슬픔이 알려졌나 봅니다.


노제를 마치기까지 수십 명의 스탭들은 끼니도 거르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순간순간 발생되는 어려운 상황을 돌파해 가며, 그야말로 전쟁 같은 준비 과정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모든 출연진들과 사회자들도 점심까지 굶어가며 훌륭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주었습니다. 전 그들이 자랑스럽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구름 같이 몰려 와 뙤약볕에서 질서 정연하게 노제가 끝나기까지 함께 해주시고, 자발적으로 광장청소까지 해 주신 수많은 시민여러분, 각자의 집에서 회사에서 길거리에서 영결식과 노제를 시청해 주신 수많은 국민 여러분. 그 분들의 뜨거운 애도와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에 노제는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이들에게 뜨거운 감사와 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마 고인도 하늘에서 모든 분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보내고 계실 겁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국민 여러분,
모두모두 감사해요!
모두모두 사랑해요!    
 

들으며  사무실에서 울었습니다.

------------------------------------------------------------------------------------
 
『노무현 대통령님. 얼마나 긴 고뇌의 밤을 보내셨습니까?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자전거 뒤에 태우고 봉하의 논두렁을 달리셨던, 그 어여쁜 손녀들을 두고 떠나셨습니까?
대통령님. 얼마나 외로우셨습니까? 떠안은 시대의 고역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새벽빛 선연한 그 외로운 길 홀로 가셨습니까?
유난히 푸르던 오월의 그날, ‘원칙과 상식’ ‘개혁과 통합’의 한길을 달려온 님이 가시던 날, 우리들의 갈망도 갈 곳을 잃었습니다. 서러운 통곡과 목 메인 절규만이 남았습니다.

   어린 시절 대통령님은 봉화산에서 꿈을 키우셨습니다. 떨쳐내지 않으면 숨이 막힐 듯한 가난을 딛고 남다른 집념과 총명한 지혜로 불가능할 것 같던 꿈을 이루었습니다.

   님은 꿈을 이루기 위해 좌절과 시련을 온몸으로 사랑했습니다. 어려울수록 더욱 힘차게 세상에 도전했고, 꿈을 이룰 때마다 더욱 큰 겸손으로 세상을 만났습니다. 한없이 여린 마음씨와 차돌 같은 양심이 혹독한 강압의 시대에 인권변호사로 이끌었습니다.

   불의에 대한 분노와 정의를 향한 열정은 6월 항쟁의 민주투사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삶을 살아온 님에게 ‘청문회 스타’라는 명예는 어쩌면 시대의 운명이었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3당 합당을 홀로 반대했던 이 한마디! 거기에 ‘원칙과 상식’의 정치가 있었고 ‘개혁과 통합’의 정치는 시작되었습니다.

   ‘원칙과 상식’을 지킨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거듭된 낙선으로 풍찬노숙의 야인 신세였지만, 님은 한 순간도 편한 길, 쉬운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노사모’ 그리고 ‘희망돼지저금통’ 그것은 분명 ‘바보 노무현’이 만들어낸 정치혁명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님은 언제나 시대를 한 발이 아닌 두세 발을 앞서 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 영악할 뿐이었습니다.

   수많은 왜곡과 음해들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어렵다고 돌아가지 않았고 급하다고 건너뛰지 않았습니다.

   항상 멀리 보며 묵묵하게 역사의 길을 가셨습니다.

   반칙과 특권에 젖은 이 땅의 권력문화를 바꾸기 위해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았습니다. 화해와 통합의 미래를 위해 국가공권력으로 희생된 국민들의 한을 풀고 역사 앞에 사과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님이 대통령으로 계시는 동안, 대한민국에선 분명 국민이 대통령이었습니다.

   동반성장, 지방분권, 균형발전 정책으로 더불어 잘사는 따뜻한 사회라는 큰 꿈의 씨앗들을 뿌려놓았습니다.

   흔들림 없는 경제정책으로 주가 2천, 외환보유고 2,500억 달러 무역 6천억 달러,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었습니다.

   군사분계선을 걸어 넘어 한반도 평화를 한 차원 높였고 균형외교로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해 냈습니다.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쓰는 세계 첫 대통령으로 이 나라를 인터넷 강국, 지식정보화시대의 세계 속 리더국가로 자리 잡게 했습니다.

   이 땅에 창의와 표현, 상상력의 지평이 새롭게 열리고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까지 한류가 넘치는 문화르네상스 시대를 열었습니다.

   대통령님이 떠난 지금에 와서야 님이 재임했던 5년을 돌아보는 것이 왜 이리도 새삼 행복한 것일까요.

   열다섯 달 전, 청와대를 떠난 님은 작지만 새로운 꿈을 꾸셨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잘사는 농촌사회를 만드는 한 사람의 농민, ‘진보의 미래’를 개척하는 깨어있는 한 사람의 시민이 되겠다는 소중한 소망이었습니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봉하마을을 찾는 아이들의 초롱한 눈을 보며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뇌하고 또 고뇌했습니다.

   그러나 모진 세월과 험한 시절은 그 소박한 소망을 이룰 기회마저 허용치 않았습니다.

   자신의 문제에 대해선 한없이 엄격하고 강인했지만 주변의 아픔에 대해선 속절없이 약했던 님.

   ‘여러분은 이제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는 글을 접하고서도 님을 지키지 못한 저희들의 무력함이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그래도 꿈을 키우던 어린 시절의 자연인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지막 꿈만큼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인 일입니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습니까? 세상은 ‘인간 노무현’으로 살아갈 마지막 기회조차도 빼앗고 말았습니다.

   님은 남기신 마지막 글에서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최근 써놓으신 글에서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실패 이야기를 쓰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남아 있는 저희들을 더욱 슬프고 부끄럽게 만듭니다.

   대통령님. 님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님의 말씀처럼 실패라 하더라도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저희들이 님의 자취를 따라, 님의 꿈을 따라 대한민국의 꿈을 이루겠습니다. 그래서 님은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있는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대통령님. 생전에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분열로 반목하고 있는 우리를 화해와 통합으로 이끄시고 대결로 치닫고 있는 민족 간의 갈등을 평화로 이끌어주십시오.

   그리고 쓰러져가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꽃피우게 해주십시오.

   이제 우리는 대통령님을 떠나보냅니다. 대통령님이 언젠가 말씀하셨듯이, 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대통령 하지 마십시오. 정치하지 마십시오. 또 다시 ‘바보 노무현’으로 살지 마십시오.

   그래서 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더는 혼자 힘들어 하시는 일이 없기를, 더는 혼자 그 무거운 짐 안고 가시는 길이 없기를 빌고 또 빕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님을 놓아드리는 것으로 저희들의 속죄를 대신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가시는 길, 이승에서의 모든 것을 잊으시고, 저 높은 하늘로 훨훨 날아가십시오.

   대통령님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했습니다.

   대통령님 편안히 가십시오.

   2009년 5월 29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회 위원장 한명숙』
이제는 그리운 당신.

이제는 남겨진 우리의 몫.

아직도 이런 글을 보면 눈물이 난다. 애 셋인 아빠가..

난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얘기할까?
------------------------------------------------

(* 여기서 호화요트는 극우 보수언론의 거짓말 물어뜯기에 대한 반어법입니다.^^ )
<* 오타 발견 : 옳바른(X) -> 올바른(O)>






자건저 타는 노간지.


한글의 위대함을 알려주는 노간지.


인디아나 노간지.


아이들과 줄다리기하는 노간지.


농촌 촌부 모델이 된 노간지.


회장님과 노간지의 만남.


네티즌이 된 노간지.


아이 울린 노간지.


신고하는 전경에 고개 숙인 노간지.


서민들과 함께 한 노간지.


아이들 눈치보며 점심먹는 노간지.


아이들에게 고개 숙인 노간지.


썰매타는 노간지.



손녀를 태우고 자건거 타는 노간지.



다정한 노간지 부부.

상록수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 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칠은 들판에 솔잎 되리라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출처] 탐진강의 함께사는세상이야기

노무현 대통령 주요 업적
1) 국가 신용등급상승 총 4단계 상승
2) 암환자 건강보험 보장률 총 20%이상 상승
3) 외한보유액 286억달러 상승
4) 주택보유율 9.7% 상승
5) 정부 R&D 예산 13% 상승
6) 육아지원예산 8000억원 이상 상승 5배이상 상승
7) 1인당 명목 국민소득 8000달러 상승(2만 달러 시대 개막)
8) 남북 인적왕래 약 10배 상승
9) 복지비율 39%상승
10) 북한 NLL침범 100회 이상 줄임
11) 국제 특허건수 1위상승 건수 1500회 이상 증가
12) 부도 업체수 90%이상 대폭 줄임
13) 전력증가 전차, 전투기, 전투함 1.7배 증가
14) 실업자수 60만명 이상 줄임
15) 기술석차 상승
16) 국가 기초 기술 상승
17) 소비자 물가 1.4 포인트 줄임(물가 안정)
18) 국가 정보 순위 11위 상승
19) 총 연구 개발비 7조원 상승
20) 공공 도서관 크게 증가
21) 미술관 증가
22) 박물관 상승
23) 종합 주가 기수 800 증가(주가 1400 시대 개막)
24) 외국인 투자 22억 달러 증가
25) 자유화 정도 FREE로 상승
26) 중소기업 현금 보유 1.9배 증가
27) 수출액 2배 이상 증가

음향 장비 고치겠다는 얘기를 아마 겨울부터 한거 같은데, 결국 교회 예산으로 하기가 힘들어져서

부서에서 알아서 예산 확보해서 다시 시도.

최초 예산이 대략 400정도였는데, 가지고 있는게 200이라고 연락이 왔더군요.

일단 되던 말던 해보자고 해서 작업 시작.

처음 생각은 예산도 부족하고 해서 메인만 바꿀려고 했는데,

발품, 몸품 팔아서 할수 있는 건 하기로 하고 대충 계획 잡았네요.

우리 교회 건물

총 9층 건물에서 8층 전체가 고등부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공간은 보통 상가 건물 정도의 높이.. 2.5미터 안될듯.

공간은 대략 150명정도 지금 예배 드립니다.

 


현재 시스템은 PMH5000 파워드 믹서 + 12인치 막통 스피커 2통이 전부.


베이스는 허접 낙원표 베이스 앰프로 끝. 일렉은 주자도 없고,


신디는 두대.. 요건 믹서로 바로 연결.


드럼은 당근 쌩으로..


스피커 위치는 가장 앞쪽 강대상 옆에 스탠드 세워서.. (메인 겸 모니터 겸~~~ㅎㅎ)


일단 할려면 제대로 하자는 생각으로...


밴드 사운드가 어느정도 나와서 제대로 예배 드리게 하자..


1. 스피커


다른 곳은 항상 12인치 정도를 썼는데, 이번엔 밴드를 위해서 15인치를 써보기로 결정.


고등부라면 그냥 설교만 할게 아니기 때문에...


요새 많이 회자되던 요크빌 15인치로 결정.


스피커 설치는 첨에는 양쪽 기둥에 브라켓으로 스피커 올릴려고 했는데,

강대상 빼고 회중석이 정사각형에 가까워서 아무래도 가운데쪽 채우기가 만만찮은...


그래서 결국 플라잉 하기로 결정.


 2. 믹서

기존 믹서를 쓸수는 없고, 저 예산으로 선택의 여지도 없어서 결국 우리 회원님 넘겨주신 Sl2442로 ...


3. 앰프


요크빌이 앰프 좀 먹어준다는 소문이~~ 그래서 그나마 예산에서 구매 가능한 레토 제품으로..

첨에 스피커 플라잉 하고 기존 pmh5000에 물려서 소리를 내봤습니다.

근데 완전 멍청한 소리 나오더군요.. 허거덩...큰일났다는 생각이 확 들면서도 전부다 바꾸고 다시 보자...


했는데, 다행히 전부 시스템 바꾸고 틀어보니 잘 나오네요. 시껍했다능.


4. 모니터 추가.

앰프는 뭔지도 몰라서 안쓰던 MA620 눈에 띔~~ 그거에다가 기존에 메인으로 쓰던 12인치 막통 연결.

그런대로 들어줄만... 이큐네 뭐네 암것도 없이 그냥 연결~

악기쪽 모니터는 신디는 기존의 액티브 모니터스피커에 그룹아웃 연결.

베이스랑 드럼쪽은 허접 베이스 앰프에 그룹아웃 연결.


5. 배선.

기존 멀티 케이블 12채널 + 송사장님한테 받은 16채널 추가로 깔았네요.

기존에 창문 아래로 지나가던걸 ELP관(CD관)으로 천정으로 배선. 옆은 랜몰드로 깔끔하게...

앞쪽 강대상은 이번 작업의 회심의 역작..  랜몰드로 멀티단자 만들어 마감.

내구성이 문제지만, 깔끔하네요.


6. 인테리어


같이 작업하신 선생님이 목공쪽을 잘 하셔서 악기 무대를 거의 다시 제작~~

배선은 당근 무대 아래로 빼고 전원소켓 및 음향 소켓은 무대에 구멍 뚫어서 단자 처리..


작업 일정은

화욜날 주요 부품 구매

목욜날 스피커 플라잉 및 ELP관 매립

토욜날 나머지 작업 완료.

토욜날 하루 작업했는데 죽겠더구만요. 이제 삭았는지 하루 일하면 며칠 간다능.


땜질은 금방 끝나는데, 그전에 배관 날리고, 선 뽑고, 정리 하는 작업이 정말 힘들어서리...

간만에 작업했는데, 결과는 아주 좋습니다.

정말 허접스럽게 한것 같은데도 나름대로 소리 잘 나오네요.

리더 선생님들도 악기 주자들도 좋아 하는것 같고.. 회중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

아쉬운점.


1. 룸튜닝이나 시스템을 위한 아웃보드가 없습니다.

믹서 채널이큐/내장FX로 해결..

덕분에 핀마이크나 성가대 마이크는 피드백 마진 얻기가 너무 힘드네요.


2. 다이렉트 박스가 없습니다.

악기(베이스/신디1/신디2)들은 일단 믹서의 라인인풋으로 그냥 연결. 어찌해야 할지 고민중.


3. 성가대 마이크가 샷건 한개 달려 있는데 소리가 너무 안좋아서 고민중.


4. 악기쪽 모니터를 쓰던거 그냥 돌려 쓰는 바람에 영..

다행인건 메인이 확실해서 모니터 소리가 메인홀로 많이 뭍혀 나오지 않아서 다행.


하여튼 관련된 분들 모두 고생 많으셨지요.
고등부 부장집사님 이하 예산 만드시느라 고생하신분들..
무엇보다 같이 작업하고 마무리 하느라 애쓰신 박범식 집사님.
코 꿰어서 스피커 플라잉이랑 관 매설하느라 애쓴 장시훈 선생님등 청년 여러분.
토욜날 나와서 같이 작업하느라 고생한 고등부 학생들.

덕분에 제가 많은 일을 덜었고 할일만 할 수 있어서 빠르고 정확하게 끝낼수 있었다능.

이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진행시켜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첨부파일은 계획했던거랑 블럭도 관련 내용>

연주곡 : 일어나비추라 ( 오라토리오  " 사도 바울 " 중에서 )

작곡 : 멘델스존

연주 : 은평교회 시온 성가대

지휘 : 유주환 집사

피아노 : 김은경 집사

오르간 : 허  란 선생

첼로 : 주미희 선생

플룻 : 조성미 선생

비올라 : 이강표 선생


요새야 겨우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얼마나 채색되었나를 생각해본다.

-------------------------------------------------------------------------

[한겨레] [뉴스 쏙]

혼인 뒤 19년 친정살이·남편 꾸짖는 당찬 여성


조선후기 노론 유학자들 '현모양처 전형' 몰아

5만원권 인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는 6월, 한국 여성 위인의 대명사인 신사임당이 들어간 5만원권 화폐가 선보인다. 인물도 정해졌고, 도안도 나왔지만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신사임당을 선정한 관점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에, 5만원권에 들어간 신사임당의 초상화도 문제가 많다는 비판이 나온다.

역사 대중화에 앞장서 온 사학자 이덕일씨가 신사임당이란 역사 인물에 대한 의견을 내놨다. 신사임당 시절의 실제와 달리 남성 중심적 생각으로 만들어진 현모양처로 그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문제 지적이다. 한국화가 우승우 화백은 신사임당 초상화를 둘러싼 미술적인 부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만들어진 현모양처, 신사임당

신사임당(1504~1551)에 관한 가장 기초적인 사료는 셋째 아들 율곡 이이가 쓴 '나의 어머니 일대기'(선비행장)이다. 부친 이원수의 행장을 쓰지 않은 이이가 모친의 행장을 쓴 것은 그만큼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이의 글을 보면 많은 의문이 생긴다. 아들이 그린 신사임당의 실제 모습은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신사임당이 중종 17년(1522) 이원수와 혼인한 곳이 외가의 외가인 강릉이란 사실부터가 심상치 않다. 게다가 사임당은 혼인 3년 후에야 시어머니 홍씨를 처음 만났다. 혼인 직후 세상을 떠난 부친 신명화의 삼년상을 치르고 나서야 상경했던 것이다.

이 무렵 조선은 혼인 방식을 중국식 친영례(親迎禮)로 바꾸려는 왕실·사대부들과 오랜 혼인 전통을 유지하려는 민간 풍습이 충돌하며 진통을 겪고 있었다. '장가(장인집)간다'는 말처럼 신부의 집에서 식을 치르고 상당 기간 머물러 사는 것이 전통 혼례 풍습이었다. 반면 왕실·사대부들은 신부집에는 인사만 하고 당일 본가로 돌아오는 친영례로 바꾸려 했다. 세종 17년(1435) 파평군 윤평이 태종의 서녀 숙신옹주와 혼인할 때 최초로 친영례를 실시했다고 < 세종실록 > 은 전하고 있다. 사임당 혼인 무렵의 임금인 중종이 재위 10년(1515) "혼인은 만세(萬世)의 시작인데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는 것은 천도에 역행하는 것이니 어찌 옳겠는가?"라고 비판한 것은 혼인 방식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위의 압박이 심해지면서 중국식 친영례로 바꾸는 사대부가가 늘어났지만 사임당과 그 부모는 전통 혼례 방식을 고집한 것이다.

이이가 신사임당이 서울 시댁에 정착한 때라고 전하는 중종 36년(1541)은 혼인 19년 후였다. 서울에 정착한 이유도 "시어머니 홍씨가 이미 늙어 가사를 돌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어머니가 가사를 돌볼 수 있었다면 사임당은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임당의 모친인 이씨도 혼인 후 16년 동안이나 친정에서 따로 살았다. 상경 후에도 사임당은 "자나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란 유명한 시구대로 친정을 그리워했다.

이이가 '나의 어머니 일대기'에서 "아버지께서 혹시 실수하는 일이 있으시면 반드시 옳은 도리로 간하셨다"고 적은 것처럼 신사임당은 여필종부보다는 때로는 남편도 꾸짖는 여인이었다. 신사임당의 꾸짖음은 이원수가 윤원형과 함께 사림을 탄압한 이기와 어울리는 것에 대한 훈계로 해석된다. 이 때문에 이원수는 이기와 발길을 끊었다지만, 그가 종5품 수운판관에 임명된 명종 5년(1550)에 이기는 영의정이었다는 점에서 의문이 있다. 이이가 부친의 행장은 쓰지 않은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신사임당은 서울에 올라온 지 10년 만인 1551년 마흔여덟에 세상을 떠났다. 이이는 사임당이 "어려서부터 경전에 통달했고 문장에 능했다"고 썼지만 글은 전해지지 않고 그림만 전한다. 이이는 "어머니의 그림을 모사한 병풍이나 족자가 세상에 많이 전해지고 있다"고 예술가 신사임당을 회상했다.

사임당은 어떻게 현모양처가 되었나?

신사임당에 대한 거의 유일한 1차 사료인 '나의 어머니 일대기'에서 현모양처로 그리지 않은 신사임당은 어떻게 현모양처의 전형이 되었을까? 이이의 제자인 사계 김장생이 편찬한 < 율곡연보 > 는 이이가 다섯 살 때 사임당이 아프자 몰래 외할아버지 사당에 들어가 기도했다고 적었다. 외가 강릉에서 나고 자란 이이가 강한 외가 종속성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기록이다.

이후 김장생의 제자인 우암 송시열이 '사임당이 그린 난초에 발하다'라는 글에서 신사임당 모자를 "상곡군 집안만이 앞에서 홀로 빛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비교하면서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상곡군은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송나라 정호를 뜻하는데, 그 모친 후씨가 정호 형제를 배출한 것이 신사임당과 같다는 발상이다. 중국과 조선의 성리학자 모자를 나란히 높여 성리학을 조선의 유일사상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끼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송시열의 제자인 노론 계열 유학자들이 다수 사임당 예찬에 가담했다. 김창협의 문인 신정하는 신사임당의 < 초충도 > 를 보고 "그린 분은 석담(이이)의 모부인인데 나는 선생과 모부인을 존경한다"라고 썼고, 송상기는 "선생은 백세의 스승이다. 세상에 그 스승을 섬기면서 그 스승의 모친께 불경한 자가 어찌 있겠는가?"라고 이이와 사임당을 동일시했다. 물론 이이의 글을 통해 사임당이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눈을 감았다.

신사임당은 이렇게 조선 후기의 집권당 노론에 의해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혼인 19년 후에야 시댁에 정착한 데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노산 이은상은 1960년대에 쓴 < 사임당 편 > 에서 '남편을 큰 인물로 만들기 위해 10년 뒤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강릉 지방 전설을 인용해 합리화했다. 물론 사임당을 현모양처로 만들기 위해 후대에 창작된 전설이다.

신사임당이 화폐 인물로 선정된 이유에 대한 궁금증이 여전하다.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선정했다면 실제 사실과 맞지 않다. 또 아들이 화폐 인물인데 모친까지 선정해야 할 정도로 한국사에 인물이 없느냐는 의문도 생긴다. 여성예술가로서 선정했다면 그럴듯하지만 허난설헌·황진이 등 다른 예술가들은 왜 탈락했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현대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자아실현형 여성은 없는가란 의문도 생긴다. 여성 화폐 인물 선정이란 시대의 목소리에 부응하는 듯한 겉모습 뒤에 현모양처라는 전통 여성상에 이 시대의 여성을 묶어두려는 속의 잣대가 작용한 결과가 아니길 바라면서 이 문제에 대한 공론의 장이 다시 열리기를 기대한다.

이덕일/사학자

한국 돈에 또 일본풍 그림

오만원권 화폐 인물인 신사임당 초상화에 대한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필자는 한국화가의 한 사람으로서 문제를 제기해 보고자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해방 60년이 지난 한국 사회가 일본식 초상화의 영향에서 벗어난 우리 전통의 초상화가 실린 화폐를 가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일제 강점기 전통 미술이 큰 타격을 입는데 그 영향이 현재 화폐 속 인물들에게도 미쳤다. 미술사가인 고 오주석 선생이 < 한국의 미 특강 > 에서 '지금 우리 화폐 속의 세종대왕과 이황·이이 선생 등의 초상은 모두 일본풍의 그림'이라고 비판한 것이 이런 현상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 초상화들은 모두 이당 김은호 계보의 화가들이 그렸는데, 이당은 1937년 조선 여성들이 금비녀를 모아 조선총독에게 헌납하는 모습 등을 그렸던 화가이다. 일본풍 그림을 이 땅에 크게 확산시킨 화가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당이 그린 신사임당 표준 영정을 배제했다면서 어떤 이유인지 그 제자에게 초상화 제작을 맡긴 것이다. 이종상 화백은 '이당의 초상화에서 얼굴 부분만 따온 것이고 머리와 복식은 고증을 받아 다시 작업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바탕은 이당의 그림이니 결과적으로 이당이 그린! 영정이 되살아나는 모순이 발생했다.

일본 인물화는 장식성이 강하며 감각적 미감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인물의 내면세계를 읽어내기 힘들다. 얼굴은 경직되어 표정이 없고 감정은 베일 속에 가려진 듯 알 수 없다. 짙은 화장으로 가리는 게 일본의 미감이기 때문이다. 조선식 초상화는 있는 그대로의 외모를 세밀하게 보여주면서 그 내면세계까지 묘사하는 특징이 있다. 이채 초상이 보여주듯 검버섯까지 그려 현대 의사들이 병명까지 알 수 있으며, 채제공 초상이 약간 사시인 눈까지 그대로 표현하듯 극사실주의 전통이 흐른다. 거기에 인물의 내면세계까지 표현해 인물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면 맑고 담담한 색채가 감상자를 깊이 빠져들게 하다가도 어느 순간 뒤로 물러서게 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세밀한 외형과 정신세계를 함께 그려 놓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많은 화가들이 이십대부터 초상화에 두각을 나타낸 것은 초상화가 시력과 직결된 문제라는 것을 말해준다. 조선은 초상화에 관한 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도화서 화원은 중인 출신이지만 국왕 어진의 작품성이 인정되면 현감 직위까지 오를 수 있는 특혜를 주었다. 어진화사는 명성이 높아 초상화 주문도 잇따랐음은 물론이다. 조선의 어진화사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젊은 화가들이 많이 선정되었다. 국민 모두가 사용하는 화폐 인물을 그리는 화가 선정은 조선시대 어진화사 선정보다 투명하고 객관적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런 절차가 생략되었기 때문에 뒷말이 많은 것이다. 한국은행은 지금이라도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우승우/한국화가

한은 가라사대
"신사임당 업적은 효성…내조…교육…"


한국은행은 2007년 11월 10만원권과 5만원권의 인물을 각각 백범 김구와 신사임당으로 결정하면서 신사임당으로 선정한 이유를 "우리 사회의 양성평등의식 제고와 여성의 사회참여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문화 중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며, 자녀의 재능을 살린 교육적 성취를 통하여 교육과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등의 효과가 기대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은이 당시 낸 보도자료 중 참고 자료의 '인물 주요 업적'을 보면 '현모양처' 측면을 중시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들이 나온다. 이 자료는 신사임당을 "사림파 집안에서 태어난 사임당은 각별한 훈도를 받아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자수와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으며, 남편 이원수를 격려하여 벼슬길로 나아가게 하고 항상 정도를 걷도록 내조하는 등 높은 덕과 인격을 쌓은 어진 아내의 소임을 다하였다. 또한 사랑과 엄격한 교육으로 네 아들과 세 딸을 모두 훌륭하게 길러냈는데…(중략) 영재교육에 남다른 성과를 보여주었다"고 설명한다.

한편 한은은 논란이 되고 있는 신사임당 화폐 초상의 원화는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승윤 발권정책팀장은 "이종상 화백이 그린 원화는 화폐를 만들기 위한 기초자료로 화폐에 들어간 도안은 이 원화를 고쳐 그린 것"이라고 설명하고 "원화를 공개할 필요도 없고 공개해 혼란스럽게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세상을 보는 정직한 눈 < 한겨레 > [ 한겨레신문 구독 | 한겨레21 구독 ]
이번 고난주간 동안 우리 교회에서는 각 교역자분들이 하루씩 가상칠언을 맡아서 설교 하고 계시는데, 역시 교계 신문에 나온 자료를 올려 봅니다.

2009/04/09 - [믿음, 신앙, 교회] - 예수님의 부활 - 그 일주일간의 행적
2009/04/09 - [믿음, 신앙, 교회] - 예수님의 부활 - 십자가 이전 시간별 사건
2009/04/09 - [믿음, 신앙, 교회] - 예수님의 부활 - 십자가상의 칠언
-----------------------------------------------------------------------------------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서 하신 말씀 중 일곱 마디가 성경에 기록되
어 있다. 그 말씀들은 사복음서에 흩어져 나타난다. 가상칠언의 순서는 중요
한 구속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수님의 가상칠언은 창조와 구속의 과
정 및 완성에 이르는 전체적인 역사적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예
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말씀하신 가상칠언에 대해 체계적으로 살펴 보았다.



1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
(눅 23:34) - 아담의 타락과 죄의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함
이 말씀에서 성자와 성부의 교통하심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
는다. 주님께서 “아버지여!”라고 하셨을 때 천지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
나님을 염두에 두게 된다. 그리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범죄한
인간들을 떠올리게 된다. 사탄으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악한 인간들이 거룩
하신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를 욕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죄에 빠지게 된 것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말미암았다. 그러나 하나님
께서는 자기 백성을 죄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들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구속 사역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메시아
로 오신 주님께서 인간들로부터 고통당하시면서 인간의 죄에 대한 용서를 간
구하고 계신다.
주님께서 저희를 용서해 달라고 하신 것은 그 죄를 모든 인간들에게 돌리지
는 말아달라는 간구의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택하신 자기 백성들 역시 ‘저
희’ 속에 포함된 인간이지만 그들에게 그 죄를 돌리기를 원치 않으신 것이
다.

2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 에덴동산의 상실과 낙원의 약속을 기억함
이 말씀에서 처음 인간 아담과 하와가 상실한 낙원을 떠올리게 된다. 인간
은 범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들
이 낙원에서 쫓겨남으로 말미암아 그 자손들은 아예 낙원 밖에서 죄 가운데
출생하게 되었다.
구약성경에서는 낙원에 관한 교훈을 지속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죄로 말미암
아 상실한 낙원이 하나님으로 인해 다시금 완벽하게 회복되는 것이 구약에
계시된 복음의 내용이었다. 아브라함에게 메시아를 언약하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그 낙원을 약속하셨다.
그 낙원이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더불어 눈앞에 확증적으로 드러나
게 되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첫 사람 아담이 상실한 그 낙원
을 완벽한 모습으로 회복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자기와 함께 십자가에 달
린 한편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
리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한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사실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아들여야 할 중요한 교훈이다.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 -
‘여자의 후손’에 관하여 기억함
이 말씀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언약하신 ‘여자의 후손’과 ‘마리아의 아
들’이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 여자의 후
손’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통하시는 가운데 육신적으로 자기를
출산한 어머니 마리아를 대면하고 있다. 그녀는 주님의 제자와 함께 찢어지
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있다. 거기 수많은 민중들이 모여 있지만 그들은 다
른 사람들과 완전히 구별되는 모습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구약성경에서 약속된 ‘여자의 후손’의 임
무는 완성된다. 그러므로 그 여자의 후손으로서 ‘아들’의 임무가 성취된
다. 따라서 인간의 몸을 입은 예수를 출생함으로써 어머니의 자리에 있던 마
리아의 역할 역시 완성된다.

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 27:46) - 성
육하신 주님을 기억하게 됨
이 말씀에서 성육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강림하신 주님의 은총을 보게 된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면서 더
럽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은 순전히 창
세 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을 구원함으로써 영원한 영광을 회복하시고자 한
하나님의 뜻 때문이었다. 이 말씀은 성육신에 대한 구약에 기록된 예언의 성
취이다.
이 말씀 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경륜을 볼 수 있
다. 즉 천상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만 하 그 놀라운 뜻을 헤아리게 된다. 구약성경에서 언약된 이사야서의 ‘고
난의 종’에 대한 의미가 이 말씀 가운데 확증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십자가에 달리신 인간 그리스도에게 임함으로써 자기 백성들에 대한 구속 사
역을 완성하시게 되었다.

5 “내가 목마르다”(요 19:28) - 인간의 몸을 입으신 주님의 고통을 기억

이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모습을 여실히 보게 된다. 하늘의 영
광스런 보좌를 버리시고 고통스런 인간의 옷을 입으시고 친히 인간의 고난
을 체휼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사탄의 손아귀에서 구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주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모든 고통을
감당하셨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은 만신창이였음에 틀림없다. 육신의 고통과 만
천하에 드러나는 그 모습은 엄청난 치욕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를 조롱하는
자들이 ‘당신이 메시아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스스로 자기를 구원해 보
라’(29-32절)며 비아냥거렸다. 그가 당할 수 있는 극도의 고난을 인간들로
부터 당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께서 왜 그런 고난을 당해야 했던가 하는 점을 깨달
아야 한다. 주님께서 “내가 목마르다”고 하신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구속
사적 고통과 비움의 의미가 실현되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6 “다 이루었다”(요 19:30) - 주님의 구원 사역의 완성을 기억함
주님께서는 고통 가운데서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고 말씀하셨다.
이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뜻이 완성되었음을 만방에 선포하는 의미를 담
고 있다. 인간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천상의 왕이 그것
을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하나님께서 이룩하신 사역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한 천국을 회복하시기 위해 하시고자 한 일을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하나
도 남김없이 다 이루셨다. 이는 창조 이전의 하나님의 작정과 사탄에 의한
인간의 타락과 직접 연관되는 의미이다. 주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교제가 회복되었
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창세 전에 작정된
하나님의 경륜과 그 후 인간들의 죄악 문제를 다 해결하셨음을 선포하셨다.
그것은 지상 사역의 성취와 영원한 구속 사역의 승리를 선포하는 의미를 지
닌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좁은 의미에
서는 그 말씀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 가운데 “하늘에서 이루
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말과 연관된다.

7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 영원한 하
나님의 영광을 기억함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을 볼 수 있다.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
고 강림하신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십자가 사역을 완성하심으로써 입으셨던
인간의 몸의 기능을 완수하신 것이다. 그 말씀 가운데는 단순히 성자 하나님
께서 자신의 영혼을 성부 하나님께 부탁한다는 요청 이상의 놀라운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성자께서 자신의 십자가 사역을 완성하심으로써 성부와 완벽
한 영화로운 교제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삼위일체의 한 위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
상에 강림하셨다. 그것은 죄에 빠진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마
1:21). 하나님께서 인간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실 자체가 엄청난 고난
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었다. 하
나님께서는 죄에 빠진 인간들이 가지는 그 고통을 감내하시면서 영원한 경륜
을 이루어 가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의 시간별 상세 행적

2009/04/09 - [믿음, 신앙, 교회] - 예수님의 부활 - 그 일주일간의 행적
2009/04/09 - [믿음, 신앙, 교회] - 예수님의 부활 - 십자가 이전 시간별 사건
2009/04/09 - [믿음, 신앙, 교회] - 예수님의 부활 - 십자가상의 칠언
----------------------------------------------------------------------

아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묵상하기 위한 그 앞뒤 행적과 사건들
의 배열이다. 시간 계산은 대략적인 추정이다.

1. 최후의 만찬
▲ 목 오후 5시 - 6시
▲ 목 저녁 6시 - 7시 / 어머니와 헤어져 최후 만찬의 다락방으로 가심
▲ 목 저녁 7시 - 8시 / 모세의 율법에 따른 만찬
▲ 목 저녁 8시 - 9시 / 유월절 만찬 후 사도들의 발을 씻어 주심. 성만찬
을 제정하심. 최후의 만찬 후 겟세마네 동산으로 향하심.
2. 겟세마네의 고뇌 - 세 시간
▲ 목 밤 9시 - 10시 / 겟세마네의 고뇌 첫째 시간
▲ 목 밤 10시 - 11시 / 겟세마네의 고뇌 둘째 시간
▲ 목 밤 11시 - 12시 / 겟세마네의 고뇌 셋째 시간
▲ 목 밤 12시 - 1시 / 체포되심
3. 고난 당하심
▲ 금 오전 1시 - 2시
▲ 금 오전 2시 - 3시 / 안나스 앞에 끌려가심
▲ 금 오전 3시 - 4시 / 가야바 앞에 끌려가심, 베드로의 부인
▲ 금 오전 4시 - 5시 / 병사들 가운데 계심
▲ 금 오전 5시 - 6시 / 감옥에 갇히심
▲ 금 오전 6시 - 7시 / 가야바 앞에 다시 끌려가셨다가 빌라도에게 압송되

▲ 금 오전 7시 - 8시 / 빌라도 앞에 끌려가시고 이어서 헤롯에게 넘겨지심
▲ 금 오전 8시 - 9시 / 다시 빌라도 앞에 서심, 예수님을 두고 바라바를 택
한 유다인들, 매를 맞으심
▲ 금 오전 9시 - 10시 / 가시관을 쓰심, 사형 선고를 받으심
▲ 금 오전 10시 - 11시 /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시어 거기에서 옷 벗
김을 당하심
▲ 금 오전 11시 - 12시 / 십자가에 못박히심
4. 십자가의 고뇌 - 세 시간
▲ 금 낮 12시 - 1시 / 십자가의 고뇌 첫째 시간
▲ 금 오후 1시 - 2시 / 십자가의 고뇌 둘째 시간
▲ 금 오후 2시 - 3시 / 십자가의 고뇌 셋째 시간
▲ 금 오후 3시 - 4시 / 돌아가신 후 창에 찔리고 십자가에서 내려 지심
▲ 금 오후 4시 - 5시 / 무덤에 묻히심

우리 교회에 오는 교계 신문에 정말 좋은 기사가 있네요.
평생 교회 다니면서도 정확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일이라 블로그에 기록해 놓습니다.

출처 :기독교 개혁신보
 http://www.rpress.or.kr/planning_special/xinu_view.php3?SN=673&CP=0

2009/04/09 - [믿음, 신앙, 교회] - 예수님의 부활 - 그 일주일간의 행적
2009/04/09 - [믿음, 신앙, 교회] - 예수님의 부활 - 십자가 이전 시간별 사건
2009/04/09 - [믿음, 신앙, 교회] - 예수님의 부활 - 십자가상의 칠언

고난주간 동안 예수님의 행적

<일요일>
▲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마 21:1-17; 막 11:1-11; 눅
19:29-44)
<월요일>
▲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다(마 21:18-19; 막 11:12-14)
▲ 성전을 정화하시다(마 21:12-13; 막 11:15-18; 눅 19:45-46)
<화요일>
▲ 성전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심사하다(마 21:23-22:14; 막 11:27-
12:12; 눅 20:1-19)
▲ 성전에서 가르치시다(마 22:41-46; 막 12:35-37; 눅 20:41-44)
▲ 마리아가 예수에게 향유를 붓다(마 26:6-13; 막 14:3-9; 요 12:2-8)
<수요일>
▲ 예수를 잡을 음모를 꾸미다(마 26:14-16; 막 14:10-11; 눅 22:3-6)
<목요일>
▲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갖으시다(마 26:17-25; 막 14:12-21; 눅 22:7-
30; 요13:1-30)
▲ 제자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하시다(요 14-16장)
▲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마 26:30-46; 막 14:26-42; 눅 22:39-46;
요18:1)
<금요일>
▲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받으시다(마 26:47-27:1; 막 14:43-15:1; 눅
22:47-71; 요 18:2-27)
▲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으시다(마 27:2-26; 막 15:1-15; 눅 23:1-25;
요 18:28-19:16)
▲ 십자가형을 받으시다(마 27:31-56; 막 15:20-46; 눅 23:26-49; 요 19:16-
30)
<금-주일>
▲ 무덤에 묻히시다(마 27:57-66; 막 15:42-47; 눅 23:50-56; 요 19:31-42)
<주일새벽> ▲ 부활하시다



저는 차를 가지고 출퇴근이나 외근이 많아지고, 집에서도 TV를 보지 않기때문에 라디오를 많이 듣게 되는 편입니다.
그런데, 요새 유행하는 음악FM이나 만담류들의 프로그램을 좋아하지 않다보니 아무래도 시사 쪽 프로그램들이 주요 청취 대상인데, 그중에서도 광고가 없는 KBS1표준과 CBS를 듣게 됩니다.

그런데 요새 KBS는 정권 바뀐뒤로 좀 적응하기 어려워서 cbs를 거의 고정 채널로 듣습니다.

아침 새벽기도 후에는 7시부터 9시까지 김현정의 뉴스쇼를 듣고,
가끔 외근중에는 12시 7080음악쇼랑 퀴즈쇼, 시사문제 다루는 프로그램 듣고,
저녁엔 6시 뉴스와 7시 시사쟈키를 듣고, 10시부터는 박종호의 가스펠아워~

그중에서도 변상욱대기자의 코너는 거의 빼놓지 않고 찾아 듣는 프로그램입니다.
아침 뉴스쇼의 기자수첩 코너와 저녁 시사쟈키~

과거 70,80년대 암울하던 시절, 거의 유일하게 유지되던 민주화 방송이던 CBS.
그 시절의 기치를 지금에도 어느정도 유지할 수 있는건 이런 분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아직도 차가 없어서 대중교통으로만 취재를 하시는..
촌철살인의 미학의 날카로운 연필이 되시는 비평.
어느누구도 비켜가지 못하는 그 칼날같은 비평.

변상욱기자의 블로그에서 본 모습은 젊어보이셨는데, 이 인터뷰기사 보니 많이 나이드셨네요.
하긴 세월이~~

방송 코너 한번 찾아 들어보시면 여러가지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방향을 찾을 수 있을겁니다.
신앙인으로써, 사회인으로써..

1.변상욱의 기자수첩 : 김현정의 뉴스쇼 아침 8시35분부터
2. 변상욱의 시사쟈키 : 저녁 7시 부터.

채널 : 표준FM 98.1MHz
 
 
 

 

"기자는 연필, 날카롭게 갈아야 한다."

CBS 변상욱 대기자(<시사자키> 앵커, <김현정의 뉴스쇼>의 '기자수첩' 코너 진행)는 "기자는 OO다?" 라는 질문에 "기자는 연필"이라고 답했다. 변기자는 "연필을 쓰려면 날카롭고 뾰족하게 깎아야하고 쓰다보면 또 닳아서 뭉툭해진다. 그러면 또 깎고 갈아야 한다. 항상 날카롭게 촉을 갈아놓아야 한다. 나이가 들어서 힘 빠지고 머리 희어져도 기자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깎고 갈아놓아야 한다."며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힘주어 말했다.

이어 그는 언론관에 대해서 "언론도 시대의 산물이기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 책임을 다하도록 끊임없이 자기를 개혁해 나가야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변 기자는 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83년에 CBS 프로듀서로 입사하였다. CBS가 보도기능을 빼앗긴 83년에 왜 CBS에 입사 했는지에 대해 "CBS를 좋아했지만 CBS는 정부에 의해 뉴스와 광고가 끊겨서 사람을 뽑을 거라 생각을 못하고, 타 공중파 방송 아나운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느닷없이 CBS가 PD를 뽑는다고 채용공고가 났다. 그래서 '커다란 방송사 아나운서로 간다고 해도 이런 방송환경에서는 아무래도 하고 싶은 말 제대로 못하고, 앵무새처럼 시키는 대로 할 거 아닌가? 차라리 CBS PD로 가자'"라고 생각했다며 CBS에 입사하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변 기자를 만난 날은 마침 김수환 추기경 선종 다음 날이었다. 변 기자는 87년에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 특집 방송 및 CBS 정상화 운동과 관련해 김 추기경과 얽힌 추억 한 자락을 짤막하게 꺼냈다.

메이저 언론사에 대한 아쉬움은 없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기독교방송에 들어오지 못했다면 지금의 '나'는 아마 안 만들어졌을 것 같다"고 답하고 그 이유는 "CBS에 들어와서 훌륭한 신학자, 목사님, 재야인사들, 민주화를 열망하던 많은 지식인들, 현장에서 열심히 뛰는 운동가들, 정말 내 인생에 있어서 도움이 되었던 맨 밑바닥에서 고생하는 철거민, 도시 빈민, 빚더미에 앉은 농민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저에게 진짜 세상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준 사람들을 만났다. 당시의 KBS, MBC처럼 큰 언론사에 갔다면 아마 못 만났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보다 훨씬 미흡한 인간이었을 텐데 기자로서 이름을 떨치는 것보다 오히려 그것이 더 실망"이라며 메이저 언론사에 대한 아쉬움은 전혀 없다고 답하였다.

예전의 CBS는 진보 언론으로 꼽혔지만 지금은 모호해진 것과 관련해서 변 기자는 "사회 정체성이 모호해 졌고, 한국교회 정체성도 모호해졌다. 한국교회라는 기반 위에 CBS가 서 있는데 한국교회도 민주화운동 또는 어려운 사람을 위해 힘을 쏟던 것에 비해서 지금은 '부자들만 위한 교회'나 '고소영', '강부자' 이런 식으로 비난을 받는다. 한국교회 전체의 색깔도 변했기 때문에, 기독교방송도 거기에 영향을 받는 것"이라 설명했다. 또 이명박 대통령이 장로라 그런 것이냐는 의견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하였다.

최근 쟁점 법안 중 방송법이 CBS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인지 묻는 질문에 "최악의 경우 크기를 절반으로 줄여야 하는 상황도 올 것"이라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기자 지망생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하자 변 기자는 "언론의 궁극적인 지향은 인간이다. 사람을 제대로 보고, 사람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고, 사람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하라"고 충고했다.

다음은 변상욱 기자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기자는 OO다? 이유와 더불어 기자님의 언론관에 대해서 말씀 부탁드려요.

기자는 연필이라 생각합니다. 쓰려면 항상 날카롭고 뾰족하게 깎아야하고 쓰다보면 또 닳아서 뭉툭해집니다. 그러면 또 깎고 갈아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힘 빠지고 머리도 희어져도 기자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깎고 갈아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자는 연필이라 생각합니다.

언론은 절대적인 지위를 지니고 있어서는 안 돼요. 물론 다른 권력이 언론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해서도 안 되죠. 언론도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 나라 사람들에게서 태어나는 시대적 산물입니다. 그 나라 사람들이 잘 못 살면 잘 사는 쪽으로, 그 나라가 불평등하면 평등한 쪽으로, 언론도 자기를 탄생시킨 그 나라, 그 시대 사회상에서 벗어나면 안 되고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언론이 겸손해야 합니다. 시대로부터 태어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 시대에 책임을 다하도록 끊임없이 자기를 개혁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하고 83년에 입사해 PD를 하셨죠. 그런데 83년이면 CBS에 보도기능이 사라졌을 때인데 왜 CBS에 입사하셨는지 궁금하네요.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해서 MBC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CBS를 좋아했지만, CBS는 정부에 의해 뉴스와 광고가 끊겨서 사람을 뽑을 거라 생각도 못했습니다. MBC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CBS가 PD를 뽑는다고 채용공고를 냈어요. 그래서 '지금 아나운서로 간다고 해도 이런 방송 환경에서는 아무래도 하고 싶은 말 제대로 못하고, 앵무새처럼 굴 거 아닌가? 차라리 CBS PD로 가자.' 그래서 갔죠. PD로 뽑혔는데 CBS에서는 그중에 한 명을 기자로 활용할 생각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 테스트를 거쳐 신입 PD 중 제가 기자로 뽑혔습니다. PD, 기자 직무를 동시에 배우고 PD, 기자를 절반씩 했습니다.

그럼 원래 기자가 꿈이 아니셨나요?

기자가 꿈이라기보다는 '언론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었고, '신문보다는 방송이 나에게는 적합하다'고 생각했죠. '아나운서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는데, 물론 암울한 저널리즘의 현실로 고민은 했죠. 그렇다고 기업체에나 그런 곳에 들어가고픈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CBS PD면 나의 신앙적 갈망과 내가 좋아하는 저널리즘의 영역이 잘 결합돼 있으니까 괜찮겠다'고 생각했죠. 지금은 기자로 남았는데, 뭐 하나님이 인도하신 대로 왔습니다(웃음).

기자생활을 하시면서 재밌는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아요. 그중 생각나는 것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1987년 1월 박종철 군 고문 치사사건이 있었을 때 돌아가신 김 추기경께서 '도대체 이 정권은 도덕성이 있는거냐?'고 전두환 정권을 향해 일갈하셨죠. 그 말씀에 힘을 얻어 '고문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라는 제목의 특집 생방송을 만들었어요. 결제와 준비를 끝냈는데, 정부가 압력을 넣는 통에 경영진이 음악만 틀고 특집은 방송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제작진들은 고민하다 동료들과 힘을 모아 간부 선배들을 내몰고 방송실 문을 잠그고 책상과 의자로 바리게이트를 쌓고 방송을 시작했죠. 방송 중에 밖에서는 동료들이 인간 띠를 만들어 방송실을 지키고 그러면서 1시간 15분 정도 항명방송을 했습니다. 그 후 기자직을 박탈당했어요.

그런 뒤에 얼마 지나 김 추기경께서 CBS에 출연 하셨어요. 'CBS는 뉴스와 해설을 제대로 방송할 수 있어야 한다. 자유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정부가 빼앗아 갔다 돌려줬다 이럴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해 주셔서 정말 힘이 됐습니다. 그렇게 걸핏하면 기자직에서 쫓겨나곤 했어요. 제가 기사 쓰는 것이 금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거 하다 정부가 감시를 소홀히 하면 다시 돌아와서 기자 노릇을 하고, 제가 만들어도 다른 사람 이름으로 프로그램이 나가고 그러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재밌었어요(웃음).
 
기자님 스타일을 보면 CBS가 아니라 MBC나 KBS 같은 메이저 방송으로 가셨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 것 같은데 아쉬운 생각은 안 드세요?

아쉬운 생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게 맞을 겁니다. 물론 더 큰 공중파 방송으로 갔으면 방송인으로서 또 다른 삶이 펼쳐졌겠죠. 그렇지만 기독교방송에 들어오지 못 했다면 지금의 나는 아마 안 만들어졌을 겁니다. 방송국에 들어와서 훌륭한 신학자, 목사님, 재야인사들, 민주화를 열망하던 많은 지식인들, 현장에서 열심히 뛰는 운동가들, 정말 내 인생에 도움을 준 맨 밑바닥에서 고생하는 철거민, 도시 빈민, 빚더미에 앉은 농민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큰 방송사로 갔다면 저에게 진짜 세상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준 사람들을 아마 못 만났을 겁니다. 기독교방송에 있었으니까 매일 그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꺾이고 다듬어 져서 오늘 이 모습이 된 것이죠.

전 변변찮아도 나쁘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이보다 훨씬 미흡한 인간이었을 텐데 기자로서 이름을 떨치는 것보다 오히려 그것이 더 실망일 겁니다. 좌우명이 '세상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명예나 공명심을 좇아도, 나만은 홀로 소나무처럼 푸르리라 (世追名 我獨松)'입니다. 물론 실천하기 어렵고 부족하지만 목표는 이렇게 해서 가야죠. 다만 한겨레신문 발기위원인데 신문 창간 때 고민했습니다. 한겨레신문에서 왜 안 오냐고 빨리 와서 함께 하자 할 때 잠깐 고민 했죠. 하지만, 신문보다는 방송일이 나에게 맞는 것 같아서 안 갔습니다.

   
 
  ▲ 변상욱 기자는 "기자는 □다" 라는 질문에 "기자는 연필"이라고 답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시간이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는 얘기들을 합니다. 기자님은 5공 때 기자생활을 시작했는데 그때와 비교해 보면 어떤가요?

5공화국 때와 비교하면 지금 기자 생활이 훨씬 더 안전하고 편한 건 사실입니다. 그때와 비교 하는 건 무리가 있죠. 다만 박정희 유신정권부터 본격화된 언론 탄압이 쭉 이어지면서 그래도 뭔가 조금씩 민주화를 향해서 역사의 흐름이 진행되고 있는 중 아닙니까. 민주화 이후 권력과 언론의 관계는 때리며 압박하고, 당근을 주면서 회유하는 관계에서 조금씩 서로 견제하는 정상적인 관계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서는 이것이 거꾸로 되돌아가서 다시 압박하고, 대형 보수신문처럼 마음에 드는 언론사, 말 잘 듣는 방송에게만 당근을 줍니다. 그리고 말 잘 들을 수밖에 없는 재벌에게 방송을 주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역사의 흐름이 뒤로 가니까, 5공 때보다는 상대적으로 낫다고는 하지만 가던 걸 되돌아가는 것이 참기가 어려운 거죠. 역사가 진보해야 되는데 후퇴하니까요.

매일 기자수첩을 즐겨 듣곤 합니다. 근데 듣다보면 속은 시원한데 이러다 다시 못 듣는 것 아닌가 걱정 할 때가 있습니다. 준비하면서 그런 염려는 안 드시나요?

걱정 없습니다. 권력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숨겨놨는데 툭 터뜨리는 것, 예를 들면 X파일, 삼성 비자금 이런 것들입니다, 그 다음에 'PD수첩' 같이 사건을 크게 확대시키는 것, 이런 비판과 반발을 모아 조직화해 운동으로 끌고 나가는 것을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기자수첩은 남들이 밝혀놓은 사실들을 모으고 골라서 새로운 사실을 끌어내거나 논리적으로 정리해서 증명해보이거나, 비꼬는 것이니 정부나 권력이 관심 크게 안 쓸 겁니다. 제가 또 '사람들을 어디로 갑시다. 모입시다' 선동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저에 대해서 관심 없을 거예요(웃음).

하지만 한미FTA 사태 후 수위가 높았던 것 같던데….

기자수첩은 본래 권력을 비꼬고, 풍자하고, 꼬집는 것을 주목적으로 기획한 코너입니다. 경험 많은 저에게 맡긴 것은 명예훼손이나 프라이버시 침해 등 자칫 넘어서기 십상인 경계선에 걸쳐가며 알아서 잘 하란 취지입니다. 잡혀 갈 듯 말 듯 더 아슬아슬하게 하라고 요구합니다. 사실 저는 점잖은 사람인데, 더 아슬아슬 하게 하라고 자꾸 그러니… (웃음). 방송사가 하고자 하는 것이니 별 문제는 없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진보언론이라면 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를 꼽고 추가한다면 MBC를 말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70~80년대 진보언론에 CBS가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전두환 정권은 CBS에서 보도기능을 빼앗아 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재 CBS의 위치는 어정쩡한 듯합니다.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 하세요?

조직은 처한 상황과 구성원들에 따라서 움직임이 달라집니다. 5공화국 때 CBS는 정권에 의해서 자유와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CBS를 지키고 싶었던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 곳이었죠. 청취자들도 정치적 차이는 있겠지만 그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질성이 강했죠.

그런데 민주화 이후에는 여러 사람들이 뒤섞이고 CBS의 역할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민주화 되지 않았냐? 기능도 정상화 되지 않았냐? 그래서 이제는 정부 비판보다는 사회 통합이나 화합 또는 복음 전파 이런 것들에 조금 더 신경 쓰면 안 되겠냐? 정부 비판하는 것은 독재 정권 때나 하면 되는 거지 지금도 그렇게 하냐?' 그런 요구들도 많아지고 CBS를 둘러싸고 있는 방송환경이 바뀌고, CBS 내부 구성원들도 예전 같은 동질성은 훨씬 적습니다.

그건 KBS나 MBC를 봐도 금방 알 수 있어요. KBS는 예전에 국영방송 공무원들과 방송공사로 바뀌면서 뽑은 공채, 각종 특채, TBC 상업방송 출신, 막 뒤섞여 지금까지 왔습니다. 반면에 MBC는 주식을 강제로 빼앗겨본 경험도 있는데다 민주화 이후에 철저히 반성하고 새로워지려고 공부하는 걸 지켜봤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의 반성이 지금도 'PD수첩'이라든지, 'MBC뉴스데스크'라든지 이런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고, 그 사람들을 둘러싼 법과 제도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그 방송사의 색깔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법을 잘 만들고 제도를 잘 만들어야 되는데, 법과 제도를 거꾸로 돌려놓으면 무너집니다. 그런 점에서 CBS의 지금 정체성이 조금 모호해진 것은 사회와 한국교회 정체성이 모호해졌고 내부 구성원의 정체성과 동질성이 흐려진 데 따릅니다. 한국교회라는 기반 위에 CBS가 서 있는데 한국교회도 민주화운동 또는 어려운 사람에게 힘을 쏟던 것에 비해서 지금은 '부자들만 위한 교회'나 '고소영', '강부자' 이런 식으로 비난을 받지 않습니까. 한국교회 전체 색깔도 변했기 때문에, 기독교방송도 영향을 받는 겁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장로라 CBS가 눈 감아 주지 않느냐는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명박 대통령이 장로라고 해서 CBS가 특별히 바뀌거나, 흔들리거나, 움직이는 건 없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김영삼 대통령도 장로였으니까 그때부터 난리가 났을 것인데 그렇지 않았거든요. 아마 내부적으로는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 김영삼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 김대중 대통령을 더 좋아하는 사람, 나름 이명박 대통령을 조금 믿어보자는 사람 등 여러 가지 성향의 사람이 섞여 있겠죠. 그래도 CBS 전통을 유지해 나가면서 어떻게든 하나로 모아가는 중이고, 그런 점에서 고참인 제가 중심을 잘 잡아야겠죠.

기자로서 방송법에 관심 가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MBC와 KBS2 민영화가 부각되는데, CBS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방송법이 CBS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 일까요?

정부가 기독교방송을 비롯해서 종교방송이나 또는 작은 지역방송들에 대해서 지원책을 마련 않고 방송법이 통과 돼 제도가 만들어 진다면 CBS는 최악의 경우 크기를 절반으로 줄여야 하는 상황도 올 겁니다. CBS는 선교방송으로서 선교, 보도, 교양의 종합방송을 지향하고 전국 네트워크를 갖고 있습니다. 선교방송이 이런 모습인 것은 지구상에서 CBS가 유일합니다. 이것을 유지 하려면 어느 정도의 기반이 마련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 기반이 되는 틀을 갑자기 흔들어 버리면, CBS는 위기를 맞겠죠. 정부가 말로는 '나름대로 국민의 기대를 안고 있는 CBS를 그렇게 안 되도록 따로 지원을 하겠다'고 하지만 공공성과 공정함을 갖춘 경쟁의 틀만 유지해주면 CBS가 살 길을 열어갈 겁니다. 따로 지원받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만 해도 되는데 굳이 방송이라고 하는 틀을 재벌 신문사, 또는 재벌에게 주겠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러면 당연히 경쟁력이 없는 방송사나 언론사의 희생을 무시하겠다는 것인데, 그런 틀은 지금 안 됩니다. 미국도 재벌의 방송참여를 처음 허용할 때는 조금만 허용하고 감독을 철저히 하겠다고 하다가 결국 재벌의 손으로 완전히 넘겨지고 신문방송이 모두 상업적이고 수구적인 조직으로 변했습니다. 이라크 침공, 미국 신자유주의 경제의 붕괴도 언론의 감시가 허술한 데서 연유한 부분이 큽니다.

방송광고공사(코바코)를 건드리는 것은 CBS를 잡아보겠다는 의도 아닌가요?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정부의 기본적인 틀은 방송을 하나의 산업으로 보고 그 산업에 재벌을 참여시키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신문 시장이 심각히 축소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현 정권이 의지하고 있는 보수 신문들도 위험합니다. 그들의 살 길을 열어주고자 방송으로 진출해서 또 다른 사업을 하도록 하려는 의도입니다. 두 가지 큰 목표가 있는데 최근 드러난 것은 보수 신문 살리는 것에 더 비중을 두는 모양입니다. 그러려면 CBS라든가 지역방송, 지역신문들의 몫을 대폭 내놓고 뒤로 후퇴시키려는 게 기본 구상인 것 같아요. 그런데 그 희생 시키는 것이 바로 국민을 위한 공익성이나 공공성을 훼손하기 때문에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경남 도민일보 김주완 기자는 '1인 미디어 시대, 블로그 10만 양병설'을 주장을 했어요. 블로그가 새로운 언론으로 가능성이 있을까요?

블로그가 지금보다 훨씬 더 성장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문제는 언론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생겼듯이 블로그도 좋은 것과 나쁜 것, 인기를 끌기 위한 상업적인 블로그가 수없이 생겨날 겁니다. 그 안에서 그것들을 정리해낼 수 있는 웹 2.0시대 또 다른 언론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역할을 지금의 언론들이 맡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예전 같으면 기성언론이 정보를 많이 그리고 빨리 전달해 주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이제는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 중에서 또는 서로 자기의 주장을 펼치는 블로거들 중에서 어떤 게 옳고 가치가 큰 것인지 국민들이 효율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평가하고 검증해 주는 역할을 언론이 떠맡아야 할 겁니다. 그래서 기성 언론이 거대하게 자리 잡고, 옆에서 블로그들이 보완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블로그가 점점 커지고 언론이 블로그를 보면서 블로그를 정리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CBS 이정식 사장이 신년사에서 "금년 CBS는 보도pp, 종합편성pp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순간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현행방송법으로는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정식 사장은 정부가 추진하는 방송법에 동의한다는 의미인가요?

방송 기술이 발전하면서 채널은 자꾸 늘어납니다. 새로이 생겨나는 채널마다 지금 방송사들이 다 가질 수는 없고 나눠야 합니다. CBS는 새로 시작 되는 채널과 미디어 중에서 CBS가 강점을 갖고 있으나 미약한 부분, TV 뉴스 쪽에 관심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보도pp, 종편pp 이런 것들이죠. '라디오 뉴스는 오랜 경험이 있고, TV도 위성TV로 경험을 쌓았으니, 이제는 TV뉴스 보도를 해봤으면 좋겠다'는 것이 CBS의 사업적인 목표입니다, 다만, 방송 영역이 넓어지고 기술에 의해서 채널이 생겨서 나누더라도 '그것을 공정한 경쟁이 불가능 하도록 재벌이나, 보수 신문들에게 정부가 밀어주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죠.

그럼 한나라당이 개정 하려고 하는 방송법하고는 관계가 없나요?

관계있습니다. 종합PP, 보도PP를 목표로 할 때 누가 가장 적합한 사업자인지 공정히 겨뤄서 결정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내놓은 것은 경쟁 자체가 무의미한 것입니다. 보수 신문이 재벌하고 손을 잡고, 누구도 따라 올 수 없을 만큼 독점한 시장 구조를 만들면서 그 안에서 경쟁 하라고 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보도PP, 종합PP는 성격 상 공익을 위해서 공공성을 갖고 공익을 위해 책임을 수행할 수 있는 사업자에게 주는 방식으로 주어야 합니다. 지금의 준공영제에 의한 한국방송의 기본 틀이 어느 정도는 유지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럼 방송법은 이전부터 개정할 계획이었나요? 현행 방송법 안에서는 그것이 안 되죠?

그것이 상당히 애매하거든요. 방송광고공사만 해도 전두환 5공 정권은 방송 구조를 확 바꿔 놓으면서 방송광고공사를 이용해서 방송과 방송 시장을 관리했습니다. 이것이 민주화 되고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되니까 전두환 정권이 만든 구조가 나름대로 자기 자리를 찾으며 한국사회 현실에 적응했습니다. 그래서 방송이 광고를 쥐고 있는 대기업이나, 돈의 영향을 직접 안 받고, 중간에 광고공사가 스크린을 하는 순기능을 하게 된 거죠. 이것을 '전두환 때 만든 것 아니냐? 없애야 한다’하는데 지금은 공익성·공정성을 보장하는 틀로 꽤 괜찮은 구조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가다듬으면서 새로운 방송 기술 발전 결과를 접목 시키고 시장을 조금씩 넓혀 나가면 되는데 이것을 뒤집어 자기들 정권의 입맛대로 바꾸려고 하니까 문제죠.

그럼 공정경쟁을 한다는 전제 하에 CBS가 이들 채널을 가져 올 가능성은 있나요?

지금 한나라당이 밀고 가는 저 상황에서는 가져오기 어렵습니다. 공정하게 한다면, 물론 CBS는 자금이 충분치는 않으니까 컨소시엄을 구성할 겁니다. 재정과 경영에서는 다른 쪽의 도움을 받지만, 방송 내용만큼은 CBS의 전통을 살려서 공정하게 하는 컨소시엄을 구성하겠죠. 경인TV방송도 그런 구도로 가져가려 했는데 변수가 생겨 참여하지 못했고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던데 아쉽습니다.

만약 CBS가 그 사업을 하려 한다면 한국교회에서 헌금으로 할 수 있지 않나요?

보수적인 대형교회들의 지원이 커져 그 입김이 뉴스 보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한국교회가 소유한 언론들을 한국교회 스스로 구조조정하고 정리하는 겁니다. CBS, 극동이 지금처럼 제각각 전국에 지역방송 연주소, 송신소를 두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한국교회가 다 먹여 살려야 하니까 낭비입니다.

CBS는 시사·교양·보도 뉴스, 극동은 선교 복음, CBS의 음악fm은 음악, 역할분담이 필요합니다. CBS 와 CTS가 무한경쟁을 벌이는 것도 무리입니다. 하나의 TV로 함께 방송하면 유지비용도 훨씬 덜 들 겁니다. CTS 설립 당시로 거슬러 가자면 당초 CBS의 명분에 재벌그룹이 자금력으로 도전하면서 엉뚱한 곳으로 사업자 허가가 가버렸고 한국교회가 모은 헌금 300억 원을 쏟아 부었는데도 살리지 못해 지금은 개인 소유의 방송이 되어버렸습니다.

한국교회가 마음을 열고 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방안을 마련하면 라디오에서는 CBS와 극동, TV 에서는 CBS와 CTS, 한국교회가 지금보다 힘을 덜 들이고도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데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분열 되어 있고 너무 제각각 자기 이익만 추구 하니까 힘을 모아내기가 어렵습니다. 아마 운영이 어려워져서 한국 교회의 방송 미디어들이 위기에 처한다면 그때는 정신 차리고 할지도 모르죠. 지금은 안하려고 할 겁니다.

96년에 <언론 가면 벗기기>라는 책을 내셨더라고요. 인터뷰 준비하면서 읽었는데 언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어요. 예전 얘기들이라 지금 상황에 안 맞는 것도 있었고요. 또 책을 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본래 권력과 언론의 밀고 당기기에 관한 책을 각 정권 때마다 한 권씩 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김영삼 정부 때 내고 나니까 너무 힘이 빠지더군요. 그 이후 것은 노트에 메모로만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글을 써 남기는 것에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글보다는 말로, 말보다는 침묵으로, 침묵보다는 삶으로 옮겨가라'는 가르침에 따라 살기로 했거든요. 글로 쓰면 자꾸 멋있게 쓰게 되잖습니까. 그러지 않으면 되지만 그럴 만큼 야무지지도 못합니다.

단순하고 소박한 진실 쪽으로 삶을 옮겨 놓으려 합니다. 사람을 쳐다보고 말하는 것이 좋고, 말보다는 입을 닫고 서로 손을 잡고 끄덕끄덕 하는 침묵이 좋고, 열심히 실천하고 땀 흘리는 그런 삶으로 가고 싶습니다. 책을 안 쓰고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 '빨리 써야 되는데' 이랬는데, 이제는 안 써도 된다는 확신 같은 것이 생겼습니다. 아마 안 쓸 겁니다. '기자수첩' 원고가 많이 쌓였고 여기 저기 칼럼 쓴 것도 한 200~300편 쌓여 있고 그래서 책을 만들자는 사람들은 있죠. 이미 원고가 나와 있고 사람들에게 공개했던 것이니 누가 가져가 책 만드는 데 쓰겠다면 그것은 가능 하겠습니다.

앞으로 계획은 무엇인가요?

CBS에 있는 동안은 계속 기자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 말 하면 사람들이 잘 안 믿어요. (웃음) 사장이요? 전혀 생각 없습니다. 별로 존경하지도 않는 목사님들에게 고개 숙이며 헌금 달라고 사정하고…. 그런 힘든 일은 사장, 상무할 사람에게 맡기면 되고, 나는 할 줄 아는 일이 기자니까 계속 하면 좋겠고, 기자직 말고 다른 목표가 있다면 그래도 지금까지 해왔던 기독교 영성과 저널리즘을 결합시킨 이야기꾼 정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후배들과 학생들을 만나서 내가 그동안 추구해 온 기독교 영성과 저널리즘을 결합한 나만의 이야기를 전한다거나 내 나름대로 바라 본 세상 이야기를 들려준다거나 하는 친절한 이야기꾼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지금도 대학 강의 나가서 학생들 만나는 게 즐겁습니다. 그것도 거창하고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어가고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기자를 꿈꾸는 지망생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저널리즘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인간입니다.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 인간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고 인간은 어떻게 적응하고 저항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가 하는 그 정황이 기자의 궁극적인 관심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시청에서 낡은 수도관을 바꿔준다. 거기에 돈 5억이 든다'라고 자료가 나오면 '서울시가 5억을 들여 낡은 수도관을 바꾸어줬다'라고 쓰겠죠? 그러나 '그동안 녹슨 수도관 물을 먹고 살아 온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들의 호소는 왜 무시되어 왔을까'라고 사람에게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기자들이 새로운 정보만 생각을 하다 보니 정책이나 외형에만 집중하게 되는데, '세상에서 제일 높은 빌딩을 잠실에 세운다거나 강을 이어서 멋진 대운하를 만든다' 이런 게 아니라 거기에서 살아가는 생명, 특히 인간에게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인간도 다 믿을 수 없으니 인간을 먹여 살리는 자연과 생명을 품고 있는 환경에 대해서도 관심을 넓혀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 자체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는 비인간적인 상황이 저널리즘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자가 되려는 후배들에게 충고 한다면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지향한다. 사람을 제대로 보고, 사람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고, 사람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하라'고 충고하고 싶습니다.

+ Recent posts